소록도

희망의 섬 소록도.

by 노군

나름 모태신앙이다. 태생이 기독교지만 소위 '개독교'라고 불리는 나사 빠진 기독교도인들의 모습들을 뉴스에서 마주할 때면 나도 참 한심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영향이 컸으므로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교회를 나갔을 거다(이게 바로 모태신앙의 의미이다). 국민학생 때까지 인천 대토 단지에 있는 주만 교회를 다녔다. 매주 일요일 아침 9시에 방영하는 디즈니 만화동산과 씨름하며 그래도 빠지지 않고 교회를 나갔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슈퍼를 폐업하고 우리 집이 다시 성빈 빌라로 돌아간 뒤부터, 무슨 일인지 어머니께서 결정하신 개척교회인 참사랑 교회로 옮겨야 했다. 국민학교 친구들이 거의 모두 모여있던 주만 교회를 떠나는 게 쉽지 않았지만 어린 시절의 나에게 원하는 교회로 출석하는 결정권 같은 건 없을 때라 군말 없이 참사랑 교회로 옮겼다.


참사랑 교회는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개척 교회들이 그러하듯, 전도에 힘을 쏟았다. 없는 교회 재정에 남을 돕는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닐 텐데 당시 참사랑 교회의 담임 목사님께서는 교회의 부흥보다는 여기저기 봉사하시는 걸 소명으로 삼으셨었다. 내가 수십 년 동안 치게 된 드럼도 참사랑 교회에 다니던 시절에 익힌 스킬이다. 어느 평일 저녁에 교회 목사님께서 잠시 교회로 오라고 하셨고 교회에 가보니 모르는 대학생 형들 두 명이 드럼을 치고 있었다. 아주 기본적인 드럼 연주법을 한 시간 동안 배우고 그 주 일요일부터 내가 드럼을 치게 되었다. 그렇게 익힌 드럼을 훗날 참사랑 교회가 사라진 다음에도 다른 교회에 가서 치게 됐으니 햇수로 따지면 10~15년 정도 될 거다. 아무튼 참사랑 교회의 담임 목사님께서는 '섬나회(섬김과 나눔회)'라는 봉사 단체의 회원이셨고 여름만 되면 교회 사람들과 '소록도'라는 이름의 전남 고흥에 있는 나환자들이 모여사는 섬에 봉사활동을 가셨다. 당연히 나도 가게 됐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여름까지, 5년 동안.


소록도는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한센병 환자(나병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요양병원을 소록도에 세우기 시작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그 당시 소록도에는 이미 나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자혜의원'이 있던 터라 전국에서 모인 한센병 환자들이 생활하는 섬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소록도를 관리하던 일본인들 중에는 환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힘을 쓴 사람도 있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인물도 있다. 특히 한센인이 임신했을 경우, 강제적으로 낙태를 시켜 포르말린에 넣어 보관했으며 소록도에서 죽은 환자들의 몸을 해부해, 연구에 쓰기도 했다. 그런 고초를 겪고 소록도에서 겨우 태어난 2세들은 수직감염의 위험이 전혀 없는 한센병이라서 당연히 정상인이었다. 하지만 전염에 대한 위험도가 높았으므로 부모와 생이별을 하며 격리조치시켰다고 한다. 현재 한센병은 치료받지 않은 상태의 환자에게서 배출된 나균에 오랫동안 접촉한 경우 발병한다. 하지만 전 세계 인구의 95%가 나균에 대한 면역력을 몸속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호흡기를 통해 체내로 들어온다 해도 발병할 확률이 낮다. 옛날에만 해도 암과 같은 무시무시한 병이었으나 주사와 약물 치료로 아주 간단히 완치가 가능한 질병이 되었다.


그렇게 청소년기를 여름이면 소록도에서 보냈다. 짧으면 4박 5일, 길면 2주에 가까운 시간을 5년 동안의 여름마다 소록도에서 보낸 거다. 어린 친구들을 소록도에 몰아넣고 시키는 일이라곤 집안 정리, 방 청소, 밭 정리 같은 사소한 일들이었다. 큰 노동을 요구하는 일은 거의 없었으며 있다 하더라도 함께 봉사활동을 온 청년들이 대부분 도맡아서 했던 기억이다. 거의 여름 성경학교 수준의 프로그램과 예배가 주를 이뤘지만 그래도 소록도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당신들의 손주처럼 아껴주시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처음에 소록도에 갔을 땐 그분들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도 싫었지만 해가 지날수록 내가 앞장서서 봉사를 했었다.


어린 시절에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나이가 들면서 한 사람의 인성을 좌우하게 된다. 꼭 봉사활동을 해야만 아이가 바르게 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학창 시절에 했던 다섯 번의 소록도 방문이 그래도 남들보다는 약간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가끔 겨울에도 간 기억이 있으니 적어도 10번은 방문하지 않았나라고 생각한다).


그 뒤에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 추천해 주신 '청소년 봉사활동 글짓기' 대회에 투고를 한 적이 있다. 지금도 딱히 글을 잘 쓰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학창 시절의 나는 위인전 따위는커녕 소설책 한 권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녀석이었다. 대충 소록도에서 봉사활동을 해오면서 느꼈던 감정들을 반성하는 의미로 써냈었는데 그게 무슨 경찰 총장상인가를 받았다. 최우수상이나 대상 외에는 거의 입상의 느낌이라서 상 앞에 이름만 다르게 붙인 걸로 기억하지만 인천 문화예술 회관에서 시상식도 하고 그랬다(부상으로 손목시계를 받았다). 나중엔 그때 쓴 글이 결국 대학 진학 때 추가 점수로 작용하여, 소록도-입상-대학 입학이라는 연결고리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내가 썼던 글이 청소년 봉사활동 글짓기 수기로 채택되어 현재도 어딘가에서 계속 교재 같은 걸로 사용하고 있는 걸 확인했다(저작권료 같은 건 안 주나?).


지금도 여름만 되면 소록도에서 보낸 청소년기가 아련하게 생각난다. 밤을 새워서 고속버스로 달려갔던 항구, 배를 타고 30분이면 도착하던 소록도, 거기에서 만난 같이 봉사활동을 하던 사람들,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시던 소록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 허스키한 목소리의 섬나회 대표님(아직까지도 소록도 봉사를 하고 계신다). 기회가 되면 다시 꼭 한 번 가보고 싶다. 희망의 섬 소록도.










+
추가로 고등학교 3학년 때 썼던 소록도 여행 수기를 첨부해 드립니다.
: )




[희망의 섬 소록도]



소록도라는 섬을 처음 가 봤을 때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봉사활동에 대한 믿음이 별로 없었던 나는
교회 목사님의 반강제적인 권유(?)로
예인교회 선교팀에 합류하여 소록도에 가게 되었다.
그곳엔 우리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대략 200여 명쯤…).

밤 11시에 간단한 주의 사항을 듣고 출발하여
소록도에 도착했을 땐 어느덧 아침 7시였다.
(소록도는 전라남도 고흥군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인천에서 약 8시간이 걸린다)

난 아무것도 몰랐다.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여기에 누가 있고, 우리가 무엇을 하게 될지....

첫째 날 -
난 무서웠다.
손과 발이 썩어서 없는 사람들이 우릴 반겼기 때문이다.
다른 봉사자들의 권유로 그 환자들과 손도 잡아보고,
껴안아보기도 하였다.
난 식은땀을 흘리며 멋쩍은 웃음만 짓고 있었다.
내가 보았던 다른 봉사자들을 마치 딴 세상 사람들 같았다.
‘어떻게 사지가 다 썩어 없어진 사람들과
우리가 같은 인간으로 살아가는가...’
그들의 육체가 썩었다면 나는 정신이 썩어 있었으므로
썩은 생각들이 그 당시에는 내 머릿속에 가득 메워져 있었다.

둘째 날 -
새벽에 일어나 새벽 기도를 다녀오고 아침을 먹은 후,
나는 벽에 붙은 봉사활동 일지를 보았다.
(‘봉사활동 일지’란 4박 5일간의 긴 봉사시간을 짜임새 있게 정리해 놓은 것)
난 순간 얼어붙어 버렸다.
“목욕시켜드리기” 가 한동안 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설마 내가 하진 않겠지?
얄팍한 생각.
역시 난 억세게 재수 없는 녀석이었다.
괜히 혼자 빈정거리다가 눈에 띄어서 목욕 팀
(환자분들을 씻겨드리는 팀)과 함께 일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다.
할아버지들의 알몸을 보고…,
그 몸을 씻겨드리고…
그분들께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때의 난 솔직히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속이 너무 울렁거렸다.
난 집에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셋째 날 -
‘오늘은 목욕 팀에 끼면 안 돼’라고 무진 생각했는데
오늘 맡은 임무는 다른 일이었다.
실로 굉장한 기쁨이었다.
사막에서 눈앞의 오아시스를 쳐다보는 듯한 기분.
모두들 연장을 들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한참을 걸었다.
굉장히 넓은 잔디밭이 보였다.
(아마 보통학교 운동장의 4배는 될 듯싶었다)
근데 그 잔디 위엔 어디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짚더미들이 많이 널려 있었다.
난 목사님께 물었다.
“목사님 저게 뭐죠?”
“응 제주도 봉사팀 등이 저번에 올라와서
잔 풀들만 다 베어 놓은 거야.”
“아~. 그래요?”
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목사님, 그럼 여긴 할 일이 없잖아요”
잔디밭에서 웅덩이까지는 약 1km는 더 돼 보였기 때문이다.
푹푹 찌는 한여름(8월 중순) 더위에
긴 삼지창 같은 걸로 짚을 리어카에 실은 다음,
끌고 가서 웅덩이에 쏟아 넣은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난 그날 밤 온몸이 쑤셨다.

넷째 날 -
드디어 집으로 가는 날이다.
난 상쾌했다.
정말 난 그때까지만 해도
‘여기에 다시는 오리 말아야지....’라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떠나기 전에 소록도에 계신 장로님을 초청해
말씀을 듣는 시간이 있었다.
난 조바심이 났다.
‘피곤해 죽겠는데 그냥 좀 가면 안 되나?’
그 장로님은 어린 시절에
‘한센병’에 걸리셔서 이 섬으로 강제로 끌려오셨다고 한다.
일제 탄압의 압박 속에 모든 걸 꿋꿋이 참고 살아오시며
많은 걸 깨달으셨다고 한다.
썩은 두 손으로 흙을 빚어 길을 만들고…
꽃을 가꾸고 집을 짓고…
그런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셨던 건
바로 주님이 계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빛과 희망을 잃지 않은 덕분에
지금은 이렇게 해방이 되어 편안하게 잘 살고 있고
부인까지 얻으셨다고 자랑을 하셨다.
그리고 그 봉사 기간 동안 내 가슴속에 품었던
쓰레기 같은 생각들을 눈물로 반성했다.
난 아쉬움 마음을 달래며 소록도를 뒤로하고 집으로 향했다.

소록도는 일제 강점기에 한센병에 걸린
(흔히들 ‘문둥병’ 혹은 ‘나병’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한센병’으로 명명되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써,
옛날엔 “그 섬에 들어가면 죽어서 나온다.”
라는 속설이 나돌아서 이웃 섬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고 한다.
한센병의 시초는 언제인지는 잘 모르지만
처음에 한센병이 나돌았을 때에는
2,000여 명의 환자들이 살았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 병은 전염성도 없고
환자들도 700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서 남은 환자분들마저
다 돌아가시게 되면 관광 명소로 바뀔 만큼 경치가 좋고 아름답다.

중요한 건
그 옛날 아무 죄도 없던 그들을 부려먹고 실험했던 사람들이
‘일본인’이라는 것이 날 참을 수 없게 한다.
(물론 ‘일본인’ 들이었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당시 그 섬에서 억압받던 사람들은 ‘장애인들’이었다)

‘그들은 알까...? 그때의 소록도 사람들의 고통과 절규를...’
그들은 죄가 없었다.
그들도 자식들이 있었고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었다.
세월은 흘러간 것이라 따질 필요 없겠지만,
지금의 우린 기억이라도 하고 있어야 한다.
현재 그들을 그렇게 만든 건(소록도에 살게 하는 것)
우리의 그릇된 시선과 편견이라는 것을…

지금 내 나이 열여덟,
많은 걸보고 느끼는 나이다.
나에게 있어 소록도 방문은 조그마한 내 인생에
한 획을 그을 만큼이나 커다란 충격이었고 감동이었다.

어느덧 소록도를 다섯 차례 다녀왔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그 섬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우릴 기쁘게 반겨 주신다.
난 그분들의 그늘진 얼굴을 뵌 적이 없다.
그리고 그분들의 눈물 또한 본 적이 없다.
매년 그곳에서 많은 걸 느낀다.
수많은 환자분들의 희망.
그분들은 팔다리가 없어도 언제나 행복한 분들이시다.

나는, 생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정답은 바로 하나님이었다.
주님이 언제나 그분들과 항상 함께 하고 계시고,
소록도에 갈 때마다 늘 주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하고 돌아온다.

내년에도 할아버지 할머니께 찾아갈 것이고,
나이가 들어도 적극 후원할 것이다.
“절망이 아닌 희망의 섬 소록도”

내가 소록도 봉사를 함께 한
‘섬․나․회(섬김과 나눔의 회)'라는 단체는
정말 뜻있고 주님께 신실하신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사람들 몇몇이 모여 만든 모임이다.

꽤 오래전부터 모임을 만들어,
매년 여름과 겨울에 수많은 학생들과 일반인을 이끌고
소록도 봉사를 하는 조촐한(?) 모임이며
한번 모이는 인원은 200~300명이다.
거기엔 봉사 시간 확인서 때문에 오는 아이들도 몇몇
있지만 거의 대부분 봉사활동 확인서를 원하지 않는다.
이번 여름에 갔을 때는
‘정말 쟤 봉사하러 온 애 맞아?’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너무 가식적이고 껄렁한 애들이 많이 왔었다.

소록도 봉사활동에는 어려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참 흥미롭다.
거의 모두가 소록도에 와서 마음의 변화를 받고 간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봉사활동에 대한 믿음이 아직 부족하다면 소록도에 한 번 가보라. 당신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봉사라는 것, 정말 힘든지 그때야 알게 되었다.
이건 그냥 파출소 앞마당만 치우는 일이 아니다.
소록도에선 악취 나는 그들의 화장실을 치워야 하고
그들이 거주하는 방도 청소해야 한다.
물론 다른 봉사활동이 쉽다는 건 아니다.
소록도에선 그 어떤 봉사활동보다 더 값진 무언가를 얻고 가게 된다.

난 당신에게 다시 한번 권하고 싶다.
삶의 애환과 그들의 장애가 준 어려움,
그리고 빛을 바라보며 사는 그들을 돕는 것이야말로
정말 보람된 봉사활동이 아닐까?


(2000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