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칼이 될 때 - 홍성수
이제 관용은 기능을 상실한 사어다.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그렇다. 시민사회의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공존하자는 순진한 감정론은 불거지는 혐오의 연쇄를 막아내지 못했다. 그동안의 대응들은 혐오표현이 혐오대상의 비속함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터져 나올 수 없는 배설임을 간과했고, 결국 사회의 염증을 악화시켰다. 혐오의 발생원을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다름’은 우열을 의미하고 다름의 ‘인정’은 나아가 자신의 우위를 증명하는 과정으로 인식될 뿐이다. 혐오는 시민사회의 기대와 달리, 다름과 차이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차별화하고 서로를 혐오할 계기를 만들어낸다. 혐오표현은 그런 오해들을 나열한 것이다.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차별이 차이를 만든다고 <파리 대왕>에서 윌리엄 골딩이 말했듯이, 혐오는 공기 중을 떠도는 즉시 실체화된다. 표현은 허공으로 흩어지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그자체로 행동이다. 혐오의 경우 폭력으로 치환되며 즉각적으로 피해자를 낳는다. 이 때 폭력의 칼날은 소수자만을 노린다. 사회에서 입지가 좁은 소수자들은 목소리를 낼 기회가 적고 방어능력이 약해 손쉬운 표적이기 때문이다. 혐오문제가 특별히 악한 개인의 죄악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인 까닭이다. 혐오는 우발적인 기행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사회구조와 편견에서 비롯된다.
기이한 점은 혐오의 표현이 가속화될수록 권력관계가 역전된 것처럼 느끼는 가해자들의 심리다. 그들에게 혐오대상은 점점 강력한 실체로 다가온다. 그들에게 혐오표현의 피해자들은 사회를 짓누르는 뚜렷한 악으로서 물리쳐야할 존재가 된다. 이런 비난은 이미 이루어진 관용에 대한 자화자찬과 교묘하게 결합한다. 재일교포들의 특권을 반대한다는 재특회는 소수자인 재일교포들이 일본의 이권을 장악해 일본인들이 피해를 입는다고 믿고 있다. 편집증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자신의 투사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공격성은 정당방위로 미화한다. 가해자들은 이내 스스로를 박해받는 순교자의 위치에 두고 성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일본혐한단체들의 움직임을 보면 이제는 확신을 넘어선 광신의 영역에 접어들었다. 선과 악의 투박한 이분법이 지배하는 세계관에서 그들은 오늘도 공해를 뿜는 일만을 단순반복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 아래에서 표현의 자유를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는 행동일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분명 올바른 생각이지만 혐오에 직면한 피해자들 앞에서는 모욕을 감내하라는 또 다른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혐오에 대응하지 말고 조용히 사라지라는 비가시화의 억압이 될 가능성도 높다. 혹은 혐오 대상에 대한 거부감의 표출로서 기괴한 것을 본 사람마냥 눈을 돌리려는 비겁함일 수도 있다. 모두 차별의 양태들이고 혐오와 공모하는 일이다. 표현의 자유는 그렇게 편의에 따라 이용하기 위해 존재하는 가치가 아니다. 표현의 자유란 이미 충분히 자유로운 강자가 요구할 권리가 아니라 소수자가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일 때 가치가 있는 것이다.
혐오표현이 차별이 만연한 현실과 만날 때 일어나는 화학반응의 폭발성을 고려하면 혐오표현에 법적조치를 요구하는 홍성수 교수의 논리는 옳다. 정부기관과 수사당국이 직접적인 구제수단이 되어 피해자들을 보호한다는 미시적인 효과가 주요할 것이고, 공공분야가 처벌의사를 밝힌다는 것만으로도 혐오행동을 억제하는 상징적 효과가 생길 것이다. 또 은폐되어 왔던 혐오문제를 공공의 이슈로 부상시키는 마중물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 문제를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끄집어내 피해자들이 고립되지 않게 하는 것이야말로 혐오에 대항하는 중요한 조치다. 무엇보다 법치사회에서 죄형법정주의와 자력구제금지는 훼손되어서는 안 될 원칙이다. 법으로 모든 혐오를 일소할 수는 없겠지만 최저한도의 보호선은 필수적이다. 법의 부재는 혐오표현으로 고통 받고 있는 피해자들이 홀로 싸우도록 방치하는 일이다.
혐오에 저항하는 또 다른 방식인 ‘대항표현’은 혐오의 악순환이 우려되지만 가만히 있는 사람을 때리는 폭력과 죄 없이 얻어맞고 반격하는 사람의 폭력을 동일선상에서 볼 수는 없기에 안타까운 심정이 공존한다. 다만 “증오로써 증오에 맞서는 사람은 이미 자기도 따라 변하도록 허용한 셈”이라는 <혐오 사회>에서 카롤린 엠케가 한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혐오로 양분된 세계에서 비판을 퉁겨내는 적대감은 악한 진영의 전유물이 아니라 선한 진영에도 깔려 있다. 인간에 대한 증오와 행위에 대한 비판을 구분해야 한다.
혐오표현이 대상을 매도해야할 평면적인 악으로 치부하는 일이라면, 혐오표현의 근절에는 다차원에서 입체적으로 보는 시각이 효과적일 것이다. 덮어놓고 배제하기 전에 현상에서 다른 가능성을 제기하는 섬세함과 상상력이야말로 투박한 차별의 이분법을 파훼할 실마리다. 그것은 파편화된 개인이 아닌 사회전체가 개별주체들을 사회규모가 아닌 개인의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 발휘될 수 있는 덕목이다. 이러한 진보의 흐름에 피해자들만이 아닌 모두가 연대해야하는 이유는 언젠가 돌아올 혐오의 러시안룰렛을 중단시킬 수 있기 때문이며, 나의 개성 역시 희소성 때문에 공격받지 않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혐오표현의 근절은 모두에게 이롭지만 잊혀버린 신뢰를 회복하는 여정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서평 <이상민 / 리플 정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