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친다는 착각

아이들은 원래 숙제를 안 하는 걸까?

by 바리

대학시절 1학년 말에 동아리 선배가 우리한테 새로 후배가 들어오면 어떤 선배가 되고 싶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한 친구가 ‘무서운 선배가 되고 싶다’라는 대답을 했었는데, 그때 난 그 대답이 좀 웃기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학원을 시작했던 초창기에 어떤 어머니들이 전화까지 해서 나에게 아이들을 무섭게 대하라며 자기 아이들을 야단을 쳐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아이가 잘못하면 야단을 칠 수도 있겠지. 학원 선생과 그 학생들이라는 관계를 떠나서라도, 우린 같은 사회에서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고 미성년의 아이들이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지적을 하고 고치라고 얘기해 주는 건 어쩌면 이미 성인이 된 사람들의 의무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치만 “우리 아이에게 무섭게 대해 주세요”라는 부탁을 들었을 때 내가 받았던 느낌은, 기이함이었다.

가끔 어떤 선생님들이 ‘난 아이들이 무서워하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웃으며 하는 걸 볼 때가 있다. 그때도 역시 불편한 느낌이 든다.


호랑이가 물어간다고 아이들을 겁주던 전래동화 속 어른들처럼, 왜 어떤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무서운’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강한 통제는 설득보다 관리 효율을 우선하기 때문에 선택되는 게 아닐까? 아니, ‘효율적인 관리’라기보다는 위계를 통해 상대의 선택 가능성을 좁히는 방식이 아닐까? 그리고 그건 혹시 나이라는 위계를 이용한 일종의 폭력은 아닐까? 폭력이란 표현이 과하다면, 청소년이라는 동료 시민에 대한 무례는 아닐까? 적어도 동등한 존엄을 전제로 한 관계의 언어와는 다른 종류의 힘이 작동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개인적으로 이런 식으로, 설득 대신 위계를 쓰는 방식, 나이와 지위를 자원처럼 사용하는 통치 방식, 아이를 아직 시민이 아닌 존재로 취급하는 태도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나는 우리 사회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선전 문구 같은 걸 쓰기 이전에 아동이라는 동료 시민에 대한 예의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민주사회에서 동료 시민을 대할 때 쓰지 말아야 할 방식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고 그걸 너무 쉽게 당연시하는 일부의 분위기가 싫다.


물론 ‘무서움’이 실제로 작동하는 영역이 있다는 걸 안다. 어떤 아이들, 어떤 맥락에서는 공포 기반 통제가 단기적 성과를 내는 게 맞겠지. 숙제 제출률이 오르고, 점수가 오르고, 특히 관리가 쉬워진다. 학급 운영과 학원 경영에서 아주 매력적인 도구라는 걸 모르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그 방식이 어떤 인간을 만들어내는가, 그리고 그 비용은 누가, 언제 치르는가의 문제가 남는 건 아닐까? 그 비용은 혹시 나중에, 아이가 커서 자율성과 책임을 요구받을 때 터지는 건 아닐까? 혹은 자기보다 약한 존재를 만났을 때 반복되진 않을까?


이건 ‘효과가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정당하냐’의 문제로 보이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숙제를 낼 때 개별적으로 각자 숙제로 해 올 수 있는 양과 기간을 스스로 정하게 한다. 숙제를 하고 나면 숙제를 하는 데 걸린 시간도 물어보는 편이다. 아이가 스스로 자기 스케줄을 미리 점검을 하고 스스로의 학습 분량을 정해서 실천하는 연습을 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래서 이 숙제는 스스로와의 약속이기도 하고 나랑 한 약속이라는 점을 매번 굉장히 강조를 한다. “넌 친구랑 약속해 놓고 아무 이유 없이 쉽게 약속을 어기는 아이가 아니잖아? 이 숙제도 그런 약속과 마찬가지의 ‘약속’이야.”

처음엔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아이들도, 자기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의 무겁고 불편한 마음이 쌓여가길, 그래서 결국은 스스로 이행을 늘리는 방향으로 변화해 갈 가능성을 기대한다.

그런데 솔직히 그렇지 못한 아이들도 많고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신뢰를 전제로 한 교육 모델'이라는 건 그저 낭만 같은 건가 싶은 생각도 든다.


숙제를 해오겠다는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는 아이들에 대한 나의 고민을 얘기할 때마다 ‘아이들은 숙제를 안 하는 게 디폴트’라고 하는 말들을 종종 듣는다. 무서운 선생님 밑에는 그런 애들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눈물이 찔끔 나게 혼꾸녕을 내줘야 한다고, 애들이 벌벌 떨게 해줘야 한다고 한다. 내가 물러터져서 애들이 그런 거라고.

내가 이 문제에 대한 어떤 해결책을 찾은 상태가 아니니 뭐라 반박할 말은 없지만, 정말로 ‘아이들은 숙제를 안 하는 게 디폴트’인 건가, 의구심이 든다. 여전히 나는 그런 아이들은 생애 초기의 교육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유치원생 무렵부터 새끼손가락 걸며 “약속한 거야, 약속한 건 지키는 거야.”라는 걸 지속적으로 가르쳤어야 하는 것 아닐까? 중학생 때는, 그래, 전두엽과 편도체의 발달이 불균형적이고 애들이 충동에 취약해서, 당장 유튜브 보고 게임을 하느라 숙제를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안 해온다고 해도, 그걸 교정하는 방법이 소리를 지르고 야단을 치고 페널티를 주는 방법 밖엔 없는 걸까? 잘 모르겠다. 아직은 그 말을 수용하기가 쉽지가 않다.

‘아이들은 숙제를 안 하는 게 디폴트’라는 문장은 겉보기엔 사실을 기술(description)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맥락에 따라 통제 중심 전략을 정당화하는 규범(norm)적 해석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이 민주사회의 시민으로 자랄 수 있는 게 맞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아이들은 원래 숙제를 안 해’라는 말은 일부 상황에서 ‘원래 안 하니까 더 강한 통제가 필요하다’,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존재로 훈련시키기보다는 통제가 필요한 대상이다'라는 말로 흘러갈 것 같은 불안감 같은 게 드는 것이다. 아이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강제로 시키는 방식, 왜 해야 하는지 스스로 이해해서 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으면 벌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걸 피하려고 하는 행동, 이건 책임감이 아니라 복종, 또는 외적 요구에 대한 순응에 가깝고, 결국 숙제란 감시받을 때만 하는 것, 권위를 가진 사람이 없으면 안 해도 되는 것, 이런 식으로 연결되기 쉬운 게 아닐까? 아이에게 통제적으로 지각된 보상과 처벌은 자유 선택 행동을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어서 외적 감시가 있어야 수행이 유지되는 경향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숙제를 베껴오거나 컨닝하는 아이들도 나오는 것이겠지. 최소 노력 전략이나 회피 전략이 증가할 가능성이 늘 있으니까.


자기 결정성 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이라는 게 있다. 사람이 스스로 책임감 있게 행동하려면 3가지가 필요하다. 내가 선택하고 있다는 느낌인 자율성, 할 수 있다는 감각인 유능감, 존중받고 있다는 경험인 관계성.

그런데 소리를 지르고, 강제로 남기고, 이런 건 전부 아이들에게 자율성의 박탈처럼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텐데, 스스로 선택권이 없고, 힘을 가진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경험이 반복된다면, 그 아이는 어디에서 토론과 책임 있는 선택과 규칙에 대한 합의와 존중을 배우지? 그런 건 정치나 윤리 시간에 책으로 배우는 게 아니라 평소 생활에서 학습이 돼야 하는 것 아닐까? 내재적 동기가 감소되면 감시나 처벌이 사라졌을 때 그 아이는 공부를 더 안 하게 될 수도 있다. 혹은 거짓말을 하거나 숙제를 숨기거나 변명을 하는 회피적 대응이 증가할 수도 있지. 권위에 대한 과격한 반감 아니면 아예 과도한 수동성을 키울 수 있는 위험도 있고 학습을 스스로를 위한 ‘성장'이 아니라 외부에 의한 ‘통제’로 인식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과도한 비약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의 축적이 그 아이에게 책임감 있는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눈치 보며 피하는 사람, 시키는 대로만 하는 사람으로 갈 확률을 키우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 자율적 동기 형성에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있지 않나 하는 노파심이 계속 한 켠에 남아 있는 거지. 많은 교육 논의에서 중요하게 제시되는 게, 자율적 판단과 책임 수행 역량이고, 우리 사회는 권위에 복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사람이 필요하니까.


물론 규칙과 그에 따른 결과는 필요하다. 아무 제재도 하지 말자는 말은 아니다. 예측 가능한 결과와 인격에 대한 공격이 없는 피드백, 아이를 ‘통제 대상’이 아닌 ‘책임의 주체’로 대하는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거다. 규칙을 어겼으니 벌을 줘서 다시는 안 하게 하는 방법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선택의 결과를 경험하게 하고 다음 선택을 배울 수 있게 하는 다른 방법이 필요한 것 아닐까. 민주적인 사회의 시민에게 요구되는 역량의 핵심은 규칙의 이유를 이해하고 선택의 결과를 감당하고 권위자와도 말로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일 텐데, 소리 지르고 강제로 남기는 공포 기반 통제는 자기 조절적 동기 형성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장기적 책임 행동 형성에 불리할 수 있다. 이건 책임감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순응 경험이 될 가능성이 있으니 말이다. 아이를 통제하면 오늘은 조용해질 수 있겠지. 하지만 아이에게 책임을 맡겨야 우리의 내일이 더 나아지는 것 아닐까. 학교에서는 이미 그런 방향으로 간지 오랜데 왜 아직 일부 학원에서는 여전히 이런 방식들이 남아 있는 걸까?


뭐, 그렇다고 내게 다른 화려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이들이 숙제를 해오지 않았을 때, 왜 숙제를 해오지 않았는지를 물었었다. 그 질문에 대답을 하려면 스스로 자신의 시간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고, 진짜 숙제를 못 할 이유가 있었는지 아닌지, 스스로 판단해 보면서 성찰을 해 볼 시간을 갖게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대답을 하면서 자기가 핑계를 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부끄러워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애초에 그렇게 변명이나 하고 있는 자신이 싫어서라도 행동이 교정이 되기를 기대한 것이고, 그런 아이들은 이후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냥 숙제를 안 하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기도 했다.

그런데 일부 아이들에겐 그 자리가 자기 합리화의 기회가 되는 것도 같았다. 숙제를 안 해와서 야단을 맞을 것 같은 불안, 또는 죄책감이나 긴장 같은 게, ‘왜 숙제를 안 했어?’라는 질문에 대답을 하는 과정에서 (변명을 듣는 나는 전혀 납득이 안 되는데) 오히려 말하는 당사자가 스스로의 변명에 납득이 되고 자기 행동이 스스로 정당화되면서, 되려 무거웠던 마음이 해소가 되는 듯이 보였다.

중학생은 아직 어리다 보니, 자기 행동을 객관화하는 능력이나 불편한 감정을 버티는 힘이 아무래도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을 테고, 자기 생각에 그럴듯한 이유를 찾으므로써 인지부조화를 해소하고 자기 보호적 추론을 하는 방향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스스로 “그래, 그럴만했어”라고 감정을 완화하고, 그 과정에서 책임은 줄고, 마음은 편해지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이 변명을 하며 개운함을 느끼는 기회를 차단하기 위해, 그다음부턴 이유를 설명하게 하는 걸 생략하고, 숙제를 안 해온 결과로써의 다음 행동은 무엇을 할 건지에 대한 계획을 얘기해 보라는 질문으로 바로 넘어가 보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 이건 숙제를 뭘 할 건지 정하는 최초의 단계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라서 별 의미가 없는 듯 보였다.

내가 이 문제(아이들의 숙제 제출률이 떨어지는 문제)에 대한 해결을 못했기 때문에, “나한테 오면 애가 꼼짝을 못 하는데 선생님이 물러터져서 애들이 숙제를 안 해간다”는 말에 아직은 반박할 말이 그다지 없다. 그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고, 실패도 많고, 성과가 바로 숫자로 연결되지 않더라도, ‘현실을 모른다’라고 치부해버리고 말기엔, 혹시 이건 (윽박지르고 야단치는 것보다는) 더 나은 방법을 찾으려는 사고의 중단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숙제를 감당하기가 벅찬 건지, 숙제를 하는 것에 의미를 못 찾는 건지, 아니면 홀로 마음속에서 지금 당장 놀고 싶은 충동과 싸우다 번번이 지고 있는 건지, 아이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숙제를 안 하는 이유’를 같이 찾아주려는 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어떻게 하면 찾아줄 수 있는지 그걸 잘 모르겠지만.



요즘 자기 주도(?)로 공부를 시키자며 아이들을 하루 12시간씩 학원에 있게 하는 게 유행인 것 같다. 방학이나 휴일엔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나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혹은 한 달 순공(부시간) 300시간, 이런 식으로 시간을 때려 넣는 학습 방법을 내건 학원들을 진짜 많이 본다. 그리고 이런 시스템을 학부모들이 좋아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아이들도 그런 걸 버텨내는 자신을 뿌듯해한다고.

그 광고를 보는 나만 갑갑한 마음이 드나 보다 싶기도 하다. 그런 광고를 볼 때마다 아이들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인데 라는 생각이 드는걸.

우리 사회가 워낙 갓생을 올려치고 자기 착취가 일반화돼 있긴 하지만 너무 어린아이부터 그런 환경에 노출되는 느낌.

요즘 코딩 좀 배운다고 AI툴 중에 하나인 copilot을 붙들고 있는데, 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있을 때가 있다. 근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copilot이 나에게 경고 문구를 보낸다. 너는 AI가 아니고 사람이니 쉬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12시간은커녕 불과 두어 시간만 지나도 그런다. AI도 다 큰 성인인 나에게 쉬면서 하라는데 부모나 선생이 아이들에게 하루 12시간씩 공부하라고 하는 게 맞나 싶은 거지.

시간 집약적인 모델은 종종 시스템의 한계를 개인의 노동으로 덮는 방식이다. 이건 반드시 무능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랑할 미덕일까? 힘들수록 효과가 있는 것 같은 느낌, 고통은 진지함과 등가인 것 같은 느낌, 이건 근거가 없는 그저 느낌일 뿐인 거 아닐까? 노력의 강도와 학습 효과의 관계는 맥락에 따라 달라지며, 단순한 등가 관계로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잠을 줄이고 여가를 포기하고 시간과 체력을 갈아 넣는 것, 그건 성실함이 아니라 번아웃으로 몰고 가는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이들이 몇 시간씩 학원에 붙들려 있는 게, 과연 저게 최선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과외를 시작한 초창기에 대체 이 아이들은 왜 과외를 하는 걸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어차피 공부란 건 제 머리에 제가 새겨 넣는 건데 이 아이들은 뭘 바라고 과외를 하는 걸까? 그때 나의 결론은 효율성이었다.

뭐, 케네디 대통령 시절 국방장관이었던 맥나마라 같은 사람처럼 구두 브리핑을 듣는 것보다 자기가 읽는 게 더 빠르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쨌든 읽기는 생각보다 고비용 작업이고 인간은 청각과 맥락에 최적화된 처리 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는 책을 읽는 것보다는 설명을 듣는 게 더 효율적이니까.

효율적으로 인지 부담을 줄이는 방법, 누군가에게 뭔가를 가르치려는 사람은 그런 방법을 찾아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 아닌가.

나는 무작정 시간을 때려 넣어서 성적을 올리는 게 혹시나 내가 그 아이에게 딱 맞는 효율적인 방법을 찾지 못한 내 무능의 징표가 아닐까 하는 불안이 있고, 내가 정해진 시간을 오버해서 수업을 하는 게 학부모들한테 내 무능의 표식처럼 보일 것 같다는 걱정이 좀 있다. 그래서 오히려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학원에 오래 붙잡아 두는 걸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위화감 같은 게 들었었다. 정말 그럴까?

물론 이건 내 자격지심이고, 학습 시간의 투여 자체를 부정하는 근거는 없다. 하지만 학습 성과는 학습 시간 증가만으로 성과를 설명하기 어렵고, 동기의 질과 피드백, 학습 설계의 영향이 크다는 연구가 많다.



그냥 혼자만의 넋두리 같은 거다. 그저 이런저런 생각이 들지만 뭐가 정답인지 잘 모르겠다. 좀 울적하기도 하다.

당장의 입시가 급한 아이들에게 이런 얘기들은 한가로운 소리일 뿐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이들이 자기를 착취하지 않고 스스로를 소진시키지 않으면서 효율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는 게 어쩌면, 뭔가를 가르치는 사람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을 설득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한다.

타인의 생각은 내가 바꿀 수 없고 나는 그저 나의 기준을 지키는 선택을 하면 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