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은 역시, 가을에 해야 제맛이다.
여름엔 땀이 나고, 겨울엔 자칫하면 얼어 죽고, 봄에는 온몸이 나른해서 그럴 기분이 영 안 나니까.
그와 달리 가을의 상쾌함은 길을 나서기 쉽게 만들어 준다. 깊어서 멀어 보이는 하늘과 나풀대는 가로수 잎사귀가 사람의 마음을 총총거리게 만든다고나 할까?
창가를 서성이다 작은 가방을 꾸려 산책이라도 가듯이 가볍게 집을 나서기에 좋다. 지금 이렇게 정신이 반쯤 없는 상태에서도, 가을에 나오긴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할 정도니까. 청계천에서 바라보는 가을 풍경은 뭐 하나 더하거나 뺄 나위 없이 샤갈의 그림처럼 완벽하다. 그래, 문제는 가출이 아니야. 가출을 하자마자 가방을 도둑맞은, 재수가 옴 붙은 상황이지! 나는 하늘에 대고 따지듯이 마구 손가락질해 본다.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도끼병도 정도껏 해야지, 어쩌다 그런 착각을 한 걸까? 그놈은 가방을 훔치려던 건데, 나 혼자 좋아서 호들갑을 떨었으니 얼마나 웃겼을까? 그래도 딱 마음에 들었는데… 하, 이런 상황에서도 스쳐간 바람을 아쉬워하다니, 미쳤다, 미쳤어! 구제불능 은하수! 한심할 따름이다. 아니지, 따지고 보면 나쁜 건 도둑놈인데, 왜 내가 날 탓하는 거야? 남의 가방을 갖고 날은 놈이 문제지! 계획적인 범죄가 틀림없다고. 아니면 그렇게 완벽하게 지하철을 빠져나갈 수는 없어. 괴도 뤼팽처럼 순식간에,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내 정신을 쏙 뺀 훈훈한 낯짝마저도 일을 쉽게 하려는 수단이 분명해. 그러고 보니 ‘요즘은 날치기들 사이에서도 성형이 유행’이란 기사를 인터넷에서 본 듯도 하다. 난 꽃미남 도둑한테 홀린 불쌍한 피해자라고, 흑흑. 누가 그런 얼굴을 안 쳐다보고 배길 수 있겠어?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이지만 위로가 된다. 그런다고 잃어버린 가방이 돌아오는 건 아니지만.
도둑놈의 발을 단 가방은 어디로 가 버렸을까? 허겁지겁 돌아와 미친 사람처럼 한참이나 들쑤시며 헤맸지만, 미로처럼 복잡하고 사람으로 붐비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놈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리 없다. 나는 우울과 실망이 마구 뒤섞여 잡탕인 상태로 역 근처 청계천으로 와, 헝클어진 머릿속을 가다듬는 중이다.
처음에 112로 신고라도 했으면 잡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177 서울콜센터? 봄에 수혁과 남산에 올랐다가, 남산도서관에서 N서울타워로 올라가는 길에 빽빽이 들어선 나무의 이름을 177에 물어본 적이 있다.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반쯤은 뭐든 대답해 준다는 콜센터를 놀리는 기분으로 둘이서 킥킥거리며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의하신, N서울타워 근처, 높이 약 200에서 230미터 지점에 위치한 그 나무는, 편백나무입니다’라는 여자 상담원의 응답이 이어지는 바람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남산에서 굴러떨어질 뻔 했다. 신속함과 정확함에 우리의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던 그들에게 다시 한번 의지해 볼까? 혹시 아냐고. ‘오전 11시쯤, 오이도행 지하철 4508번 차량에서, 분홍색 여행 가방을 들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 내린 미남 도둑은, 10번 출구로 나갔습니다’라고 말해 줄지도?
지갑은 여권, 휴대폰과 함께 어깨에 메고 있던 크로스백에 넣어 둬서 그나마 다행이다. 지금이라도 112에 신고할까? 하, 집을 나설 때 끈 폰을 다시 켜고 싶지는 않아. 지금까지의 수더분한 삶에 대한 연결 고리를 끊는다는 각오로 배터리까지 뺀 나라고. 1시간도 안 되서 다시 켠다는 건, 난데없이 도둑질을 당한 것보다 더 불길한 낌새이자 엄마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항복과도 같으니까. 밑도 끝도 없이 긍정적인, 다른 말로 하자면 눈앞에 펼쳐지는 어떤 나쁜 일에도 별로 영향을 안 받는 내 성격 탓인지도 모른다. 무조건 그곳으로 돌아만 가면 놈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섣부른 희망, 심지어 가방이 아직 그 자리에, 놈이 내린 승강장 앞에 떡하니 놓여 있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기대까지 했으니까. 멍청하긴! 당연히 놈은 가방을 들고 오페라의 유령처럼 사라진 지 오래다.
아쉽지만, 내 첫 가출은 이대로 막을 내려야 하는 걸까?
* 촛불 맨드라미는 2017년 한 해 동안
스토리오브서울(www.storyofseoul.com)에 연재됐던 소설입니다.
스토리오브서울의 동의를 얻어 이번에 브런치에 재연재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