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맨 18화

둘째 날. 하수 :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다

by 홍유진

내가 딱 그랬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쐈다.


스스로 날아든 건지 뭐에 떠밀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


그저 얼떨떨하다. 조금 전까지 나는 낮은 담벼락에 몸을 숨기고, 작은 마당에서 소곤소곤 새어 나오는 비밀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 도대체 내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을까?






내 남자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나는 그곳을 향해 대학로를 천천히 걸었다. 운의 집은 마로니에 공원에서 10분 거리인 낙산 중턱에 있다고 친절한 민우 씨가 말했기에,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아르코미술관 옆길로 나가 간판이 우아한 모차르트 카페를 지나 골목 끝까지 쭉 직진하다가 갈림길에서 우회전, 조금 걷다가 마로니에 소극장을 끼고 좌회전해서 낙산공원 쪽으로 슬슬 오르기만 하면 됐다. 가는 길 곳곳에 벽화가 그려져 있어 덤으로 눈까지 정화했다는 말씀!


16회 4 이화동벽화마을 표지판.jpg

‘이화동 벽화마을’이란 표지판을 보자, 한국의 ‘몽마르트르’라며 이곳을 소개한 인터넷 뉴스가 어렴풋이 기억났다. 낙산은 낙타 등을 닮아서 ‘낙타산’이라고도 불린다고. 에휴, 가방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혁과 함께 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기자기한 골목 분위기에 빠져 이끌리듯 언덕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노을이 느릿느릿 번지기 시작했다. 노르스름한 자연의 물감이 더해진, 저녁 향이 감도는 동네는 내게 집을 생각나게 했다. 엄마표 얼큰한 김칫국이 기다리는 우리 집, 그래도 아직 돌아가고 싶단 마음은 안 드는 곳.

16회 2 마로니에 소극장.jpg


운의 집은 낙산전시관 아래 첫 집이었다.


회색 콘크리트로 대충 마무리된 그 집은, 친절한 민우 씨의 설명대로 대문 쪽 벽에만 초록빛 풀밭 위로 분홍과 보라가 어우러진 맨드라미가 그려져 있어 눈에 띄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맨드라미 사이로 나비까지 날고 있었다. 그려진 지 오래돼서인지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손을 타서인지 4마리는 뭉개지고 이지러져서 몸통만 겨우 남았지만, 검은 테두리에 밝은 파랑 점이 찍힌 노란 나비 2마리만은 고흐가 막 붓을 뗀 듯 꿈틀거렸다.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오르며, 나비가 내게 속삭였다. 이제 모두 다 잘될 거라고.


나비의 속삭임에 취해 아무 생각 없이 운의 집 초인종을 누르려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운이 나를 눈치채고 가방을 들고 내빼면 안 되니까. 나는 대문 말고 다른 출구가 또 있는지 살피려고 전시관 계단 위로 올라가 집 주변을 훑어봤다. 작은 마당 옆으로 방 3칸이 일직선으로 붙어 있고, 담이 따로 없이 집이 뒷집에 바로 붙은 단순한 구조라서 운이 달아날 구멍은 없었다. 마당 역시 높다란 시멘트 벽에 막혔고. 좋아!


나는 다시 맨드라미집으로 살그머니 다가갔다. 도둑놈의 집이니, 무턱대고 들이닥치다가는 본전도 못 찾는다니까? 그래서 먼저 우편함부터 살며시 열어 봤다. 고지서가 2장 들어 있는데, 받는 사람은 하나같이 ‘황귀녀’였다. 누굴까?


부모님의 이름치고는 촌티가 풀풀 났다. 살그머니 제자리에 넣고 까치발을 들어 대문 너머로 마당을 살피려다, 조각상처럼 굳고 말았다.


마당에 누가 있어!


헐떡이는 가슴에 손을 대고 대문 틈 사이로 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한 사람은 소꿉장난에나 쓰일 것 같은 작은 의자에, 다른 사람은 네모난 상자 위에 앉았다. 어딘지 익숙한 느낌에 상자를 찬찬히 뜯어보니, 세상에! 내 가방이다!


잃어버린 알프스가 거기 있었다.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