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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유진 Aug 02. 2021

웰컴 투 항암월드 12화

실화 소설

  항암 2주 차.

  신세계가 서서히 본모습을 드러냈다. 겪어 봐야만 아는 항암월드. 






  생리가 일주일째 계속되고 있었다. 고장 난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듯 새빨간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노루의 발자국은 다리를 넘어 몸과 얼굴로 올라왔다. 무엇보다도 여전한 땀. 땀은 저녁마다 찾아와서 새벽까지 소나기처럼 쏟아지다 아침이면 거짓말같이 멎었다. 울렁거림도 갈수록 심해졌다. 구토억제제를 맞고 진토 패치까지 붙이자 살짝 나아졌지만 아침의 찐 밥 냄새는 점점 견디기가 어려웠다. 살아남으려면 먹으라는 대양의 말을 떠올리며 어떻게든 꾸역꾸역 밥숟가락을 밀어넣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이번 주부터는 밥그릇의 뚜껑을 열기만 해도 메스꺼워서 양은 손사래를 쳤다.


  그렇기에 빵식의 발견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이따금 병원식이 담긴 쟁반에 손바닥 만 한 종이가 놓여 있었다.

  처음에 양은 그릇이 가리지 못한 윗부분만 보곤 일주일 동안의 메뉴를 설명한 종이라 생각하며 지나쳤다. 어떤 메뉴든 밥은 언제나 찐 밥이고 소금 간이 거의 안 된 반찬들은 지독하게 맛이 없다는 점에서 같았다.


  그러다 종이의 아랫부분이 밖으로 보이게 끼워진 날이 있었다. 그곳에는 메뉴보다 훨씬 작은 글씨로 빵식과 곰탕식, 미음식 신청자는 간호사실에 이야기하라고 적혀 있었다. 병원에서 빵식이라니!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다음날, 처음으로 아침밥이 기다려졌다.


  도대체 어떤 빵이 올 것인가.






  드디어 도착한 빵식은 기대 이상이었다.


  햄과 계란, 옥수수 알이 버무려진 먹음직한 치즈 토스트! 따끈따끈한 크루아상과 오믈렛에 딸기 잼! 케첩과 커다란 소시지가 곁들여진 베이글 등이 매일 아침, 양을 행복한 식사로 이끌었다. 양은 접시에 흘린 빵 부스러기까지 남김없이 먹었다. 왜 이제까지 빵식을 신청한 사람이 주변에 없는지 이상할 정도였다.


  용기를 낸 양은 곰탕식에 도전했다. 곰탕은 한 그릇 당 만 원으로 일반 병원식보다 몇 배나 비쌌다. 먹어 보고 별로면 바로 취소하면 되지. 생활을 위해 늘 밥값을 아끼던 양이었지만 죽음을 앞둔 지금, 그럴 마음은 없었다.


  금희는 양의 변화가 반가웠다. 약할 대로 약해진 양의 몸이 항암 치료를 버틸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애가 이 지경이 되도록 몰랐을까? 어디든 조금만 부딪쳐도 멍이 들고 아프댔는데… 금희는 스스로를 괴롭도록 탓했다.


  병원에 와서 보니, 양은 뼈가 배겨 어디로 누워도 불편할 정도로 살이 빠진 상태였다. 금희가 알기로, 곰탕은 예부터 간을 보호하고 기운을 북돋아서 약한 사람들에게 좋았다. 양과 대양이 어릴 때, 겨울마다 곰탕을 끓였던 이유다. 금희는 곰탕에 은근히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곰탕 역시 주위에 먹는 사람이 없었기에 양은 일단 저녁 식사로만 신청했다.


  결과는 대만족!


  병원 밥은 맛이 없다는 편견을 완전히 날려 버리는 맛있는 곰탕이었다. 만 원이 전혀 아깝지 않은 요리였다. 변함없는 찐 밥이라도 곰탕에 말면 한 그릇이 금세 비워졌다. 곰탕 덕인지 양의 울렁거림도 덜해졌다. 노루의 발자국도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느낌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찾은 점심 특식은 빵식과 곰탕식과 더불어 그야말로 항암월드의 오아시스였다.


  점심 특식에 대한 안내지도 분명히 왔을 텐데, 양은 그동안 본 기억이 없었다. 빵식을 맛보며 식사 쟁반에 담겨 오는 종이들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고, 그런 노력의 결과로 점심 특식에 대한 안내지를 찾을 수 있었다.


  병원 밥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그 가격, 그대로 화요일과 금요일에 특별한 점심을 선택할 수 있었다. 자장면이나 카레라이스, 비빔밥 등이 가능했다. 달콤한 자장면부터 맵고 짭짜름한 고추장을 섞은 비빔밥까지 먹을 수 있다니!


  이렇게 점심까지 모두 해결되었다.

  양은 이제 병동에서 밥을 가장 잘 먹는 환자가 되었다.


  그러자 구내염, 신장 독성 등 항암제의 많은 부작용이 양을 살짝 비껴갔다. 죽여야 할 암세포가 너무 많아서 항암제의 부작용이 적은 건가? 이런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저 엄청난 축복이라는 사실을 양은 알 수 있었다.


  양이 머무는 6인실의 사람들만 둘러봐도 그랬다. 한 끼도 안 먹고 노란 영양제에 의지해 하루 종일 잠만 자는 1호 자매, 노란 치즈를 얹거나 의사 몰래 끓인 컵라면 국물을 부어 찐 밥을 억지로 삼키는 2호 자매, 머리에 큰 부스럼이 잔뜩 나서 언제나 군만두를 찾는 4호 자매, 하루 종일 혀 짧은 소리와 멀쩡한 말투를 몇 번이나 오가는 5호 자매, 밥만 먹으면 토하느라 비쩍 마른 6호 자매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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