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와닿지 않는 문제에 정답을 낼 수 있다면 '똑똑한 사람'이라고 말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지식을 기반으로 인정받은 답이기에 시간에 제약을 최소한으로 받으며, 그 답이 유효해야 한다.
영리함
'영리함과 현명함'은 행동력을 기반으로 한 경험이 더해져서 다양한 상황 속에서 이득을 볼 수 있게 판단할 수 있는 소양이다. 여기서 이득이란, 즉각적으로 와닿는 결과에 국한되지 않는다.
먼 미래를 바라보며 하는 판단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영리함' 그리고 '현명함'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낸다는 점에서 '똑똑함'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 해결책이 "당장 와닿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점에서 '똑똑함'과는 다르다.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먼 미래를 보고 장기적으로 판단 속에서) 이익을 볼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했다면 그게 '영리함 그리고 현명함'이다. 즉, '영리함'과 '현명함'은 그 판단이 타당하지는 바로 알아보기 힘들며,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아~ 그래서 이렇게 판단한 거구나'라고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영리함과 '현명함'은 실제 상황으로 문제가 국한되며, 이 '실제 상황'이라 함은 정답이라는 것이 없다.
누가 별도로 가르쳐주지 않아도 " 어떤 상황에 '밀고 당기는 것'이 이득인지 파악하고 수행할 수 있는 그 행동력 "을 경험 속에서 빠르게 깨닫고 습득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보면 부럽게만 느껴진다.
지금생각해 보면 내가 가장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 나에게 장기적으로 이득인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현명함'이라는 소양이다.
엄격함&냉정함, 배타적&냉소적은 엄연히 다른 말
'엄격함'이라는 타이틀 뒤에는 '배타적 그리고 냉소함'이 자리 잡았다.
학창 시절부터 대학교 때까지 나는 매번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었다.
'엄격함'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고 싶지 않았기에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깎아내리면서까지 많은 것을 잃어갔다. 그렇게 대학 신입생이 되어서도 나와는 다른 학우들을 배척했고 그들이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며 살곤 했다. 그들에 비해 나는 뛰어나고 잘하고 있다는 '냉소함' 속에서 자만심이 커져만 갔다.
그렇게 여러 사람들을 잃으며 혼자가 되었고 어느덧 3학년 1학기를 맞이했다.
나는 도서관에서 홀로 공부했고, 학우들과 관계가 틀어지면서 그들에게 인정받고자 했던 '학업의 목적'을 잃기 이르렀다.
다른 이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던 나는 '주변 사람들'을 잃고 나서야, 그들이 소중한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자만과 냉소'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인정하며 용서를 구할 수 있는 나'는 잃은 지 오래였고 학부 과목에 관심을 잃으면서 예정에는 없었던 교사지망생들이 듣는 '교육학'을 듣게 되었다.
엄격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하는 가르침
지금 돌이켜보면 '교육사회학 수강'이라는 선택은 나를 바꾸는데 큰 영향을 끼친 듯하다.
당시 뵈었던 은사님의 성함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지금도 시간이 될 때 멀리서나마 어떻게 지내시나 검색을 해보곤 한다. 그분이 내게 주신 깨달음은 나의 가치관을 바꿔놓는데 일조했다. '대학 서열'에 목매어있던 나에게 교육관에 있어서 의문을 갖게 해 주셨고, " '냉정한 눈, 따뜻한 마음'을 갖고 사람을 바라보라 "는 말씀이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제야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간 내가 얼마나 무지했고, '엄격함'과 '냉정함'이라는 타이틀에 목말랐으며, '나와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며 그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가 없는 사람인지를 말이다.
내게 가장 부족한 것은 시간 투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똑똑함'이 아니었다. 여러 경험 속에서 실패를 인정하며 '영리함' 그리고 '현명함'을 얻을 용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