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Threads에 "SNS의 댓글 구조 비교"에 대한 글을 작성하면서 서울교대 교수님이 '좋아요'를 남겨주신 것을 보고 놀란 일이 있었다. "봐주셔서 감사하다"라고 말하기 전에 그분이 어떤 활동을 하시나 찾아보고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 교수님 입장에서도 생산적인 활동이 되리라 생각했다.
검색해 본 결과, 앞서 다가오는 2025년에 AI 교과서를 도입한다고 한다. 여기에 권정민 교수님께서 부정적 의견을 내신 걸로 뉴스기사에서 확인했다.
솔직히 말하면, 기사의 교수님 의견은 자세히 보려고 하지 않았다. 고의적으로 그렇게 했다. 나는 무언가를 읽기 전에 그 주제를 파악하고 내 생각부터 적는다. A를 흡수하기 전에 B를 적어놓으면 A, B 둘 다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A를 그대로 흡수하는사람이 둘이나 있을 필요는 없다.정보를 있는 그대로,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생산성을 극대화시키는 방식이 아니다.
인공지능 교과서에 대한 내 견해
인공지능 교과서에 대한 내 생각은 우선 부정적이다. 얼추 기사 내용을 훑어보고 느낀 바로는 일단, 핵심 키워드는 '종이가 없다', '맞춤화' 교과서라는 것이다. 학생마다 교과서를 다르게 볼 여지가 생긴다는 것이다.
낙관론에 대한 입장은 아래와 같은 듯하다.
1. '창의력을 키우는데 교과서가 직간접으로 기여한다.'는 의견
2. '수준별 교과서를 도입하여, 멍하게 보내는 시간과 특정 교과(특히, 수학)에 소외되는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낸다.'는 의견
일단 여기에 대한 반론과 내 생각을 적자면: 공교육의 목적은 '사회화'이고 수학도 '사회화'되기 위한 일부에 속한다. 그리고 문제 해결 능력은 주어진 시험문제를 푸는 것으로는 얻을 수 없다. 경험 속에서 그 개념을 자신이 끄집어내는 '행동력'에서 나온다. 이에 대한 썰은 글 맨 아래에 배치해 두었다.
창의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창의력'이란 사회인들의 다양한 생각을 들은 환경이 조성되어야 하고 고통과 시련을 간접적으로나마 보면서 극대화된다. 그 자체가 남들이 피해왔고 겪지 않으려고 했던 '희소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예술 거장의 일생을 보면, 가장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도 작품을 냈다. 이를 브런치에 '쓰다가 중단한 글'을 작성하면서 "고흐와 고갱"의 일화와 작품 시기를 비교하면서 확인했다. (반면, 피카소는 좀 달랐다. 특이한 케이스인 듯하다.)
반면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학교에서 교과서를 보고 배우면서 학생들 간 커뮤니케이션을 하는가? 생각을 적극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기는 한가? 시험지에 푼 문제의 개념을 실생활에서 꺼내 쓸 수 있도록 학생들에게 지도가 가능한가?
물론 가능하다. 맨 후자에 있는 항목은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상사가 시킨 점을 수행하며 노동을 하면서도 그를 깨달았다. 다만, 외부의 의존하지 않고서는 스스로 그 개념을 못 꺼내 쓴다는 치명적 문제가 있다. 활용 방식만 달랐지, 전날에 응용한 방식과 오늘 응용한 방식은 공통된 개념을 내재하고 있었다. 모두 '무게중심'을 실생활에 활용하라는 것으로 동일했다.
내가 생각하는 공교육의 문제점
학교에서 무게중심을 가르쳐주고, 시험지에 내면 잘 푼다. 근데, 실생활에 그 개념을 같이 제시 안 하면 스스로 못 꺼내 쓰는 경우를 내가 겪은 것이다. 시험지를 푸는데 중점을 둔 교육의 부작용이라고 본다. 개념을 배우는 목적 자체가 시험지를 잘 풀기 위해서니까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멍하게 시간 보내는 것이 문제라면, 실컷 놀면서 그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학생들 스스로가 해결해 나갈 수 있게라도 해줬으면 한다. 그게 '사회화'고 문제해결을 다른 누구의 직접 배워나가는 과정이다. 꼭 교과서를 통해 '가르친 내용'을 기반으로 학생들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
사회는 늘 빠른 방법을 선호한다. 느리게 보이는 방식이 오히려 정확하면서 의도한 것에 가까울 있다는 것은 간과하기 쉽다.
프로젝트를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새로 짜는 코드가 더 빠른 해결책이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우리는 '빠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기존 코드의 수정과 디버그에 집착한 나머지, '새로 코드를 짜는' 방안을 간과한다.
맞춤화 학습, 서로 다른 교과서
맞춤화 학습이라... 그럴싸하다. 좋은 학습이 될지도 모른다. 다만, 학생들에게 다른 교과서를 배부하면 안 된다. 서로 다른 내용을 보고 이야기를 한다면 대화가 될까?
토론까지는 기대도 안 한다. 시험문제 풀기 바쁜데 학생들이 특정 주제를 고르고 토론이 가능하기나 할까? 질문과 답을 학생들 스스로 자율적으로 한다고 '가정'만 해보자. 교사는 "일시적"인 역할을 지닌 교육자이다.
학생들은 학교를 졸업해서 사회에 나가게 된다. 사회에 나가서 지낼 학생들끼리 잘 이야기하고 사회에 녹아들어 갈 수 있게 하는 것이 "공교육의 본질"이다.
어떤 이들에게 특정 내용이 동일한 개념이지만 다른 누구에겐다른 형태로 쓰여있다면 학생들이 여기에 대해서 서로 질문하고 답을 할 때 원활할 수 있을까?그러한 활동이 수월하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에 대해 "내용의 형식과 표현에 있어서" 차이가 나면 안 된다.
아날로그 책의 장점
아날로그와 디지털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나는 아날로그만의 장점이 있다고 확신한다.
아날로그 종이책은 책의 구성을 볼 수 있는데 특화되어 있다. 책의 구성을 대표하는 것은 목차이고 그 책의 내용이 많아지면서 목차의 역할은 더 중요해진다.
교과서의 구성에 익숙해지는 것은 학습을 잘하는 데 있어서 필연적인 과정이다. 책을 공부하면서 "어떤 내용이 책의 어디쯤 있다."를 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책에 익숙해져 있다는 반증이다. 그리고 어떤 내용이 어디에 배치되어 있는지를 안다는 것은: 책의 순서를 인지하고 있지 하고 있다는 것이고, 책의 순서를 인지하고 있다는 것은: 배워야 할 순서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기회를 아날로그를 디지털로 대체하면서 박탈한다? 친환경이 중요하다면, "플라스틱 빨대랑 일회용부터 매장 내에서 쓰지 말게" 좀 해보면 어떨까. 나는 현 정부가 '우선순위' 자체를 파악 못하고 있다고 보며, "쉽고 빠르게 보이는 선택지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척"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이 프로젝트는 좋지 않게 끝나리라 생각한다. 사람을 사회화가 아닌, 부품화 시키는 프로젝트로 보이기 때문이다.
"맞춤화 (서비스)"란 용어는 소비자를 중심으로 쓰는 말이다. 학생들은 단순히 교육 서비스의 소비자가 아니다. 그들은 대한민국을 이끌어 나가야 할 공급자로 키워야 한다. 서비스를 받는 입장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때로는 문제를 지면도 해보고, 학생들끼리 충돌도 해보고, 사랑도 해보고, 같이 울어보기도 하고, 다양한 것을 겪게 해야 하고 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도 "다른 이(선생)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돕는 것이 공교육이고 걸음마를 걷는 학생들을 지켜보면서 '최소한의 개입을 통해' 학생들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생활 지도, 진로 지도, 상담 지도)이 교사의 역할 중 일부이다.
역할이 많은 만큼, 그들이 가진 권한을 커야만 한다. 그럼에도, 서초구 교사 사건이 시사하는 바는 '교권의 추락'이다. 정부는 그러한 문제부터 똑바로 해결해야 한다. 이를 방치하고 새로운 문제에 주목하려는 것은 사회인으로 비유하면 '초짜', '실격'에 해당할 것이다.
노동을 하면서 배운 개념의 적용
그간 일을 하지 않은 것은, 바보가 되어가는 지름길이었다.
어제
메모의 일부 (끌게 위에 짐에 있어서 빨간 짐은 가벼운 것에 해당)
어제 주어진 업무는 끌개 위에 무거운 약품 3박스 그리고 가벼운 조제약 1박스를 운반해서 500m 거리의 고객에게 전달하라는 일이었다. 빡대가리였던 나는, 박스의 부피만을 보고 판단을 내렸다. 부피가 큰 박스를 아래에 두는 것이 작은 박스들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안정적인 구조라고 생각했지만 고려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다름 아닌 '무게'이다.
같은 무게라면 작은 박스를 맨 위에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무게가 다르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끌개를 를 밀고 길게 이동하다 보면, 멈추는 상황이 발생하기 마련이고 속도를 줄이다 보면 '관성'에 의해서 무거운 짐은 운동에너지를 더 받는다.
나는 이러한 개념들이 머릿속에 있음에도 꺼내 쓰지 않은 셈이고, 어떻게 응용할지 다른 방법이 없는지 생각조차 안 한 것이다.
오늘
오늘은 한 일은: 창고에서 보관 중인 약품을 "계단을 거쳐서 위층으로" 들고 오라는 것이었다. 검은색 포장지의 약품은 빨간색 박스의 약품보다 2배 정도 무겁다. 어제의 나였다면 부피에 입각해서 검은색 약품을 맨 아래에 뒀을 것이다.
여기서 머리를 좀 굴렸던 것은, 어제 내가 겪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이 크게 작용했다. 이러한 업무가 어제의 끌게 와 다른 점은 운동에너지가 수직으로 더 크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어제 있었던 끌게는 수평으로 운동에너지가 크게 작용했을 뿐, 그 방향에만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무겁고 긴 물품을 맨 아래에 두면, 저 부피가 긴 것을 한꺼번에 들고 오는 과정에 있어서 '기울기'가 어쩔 수 없이 발생한다. 가벼운 물품을 3개씩이나 맨 위에 위치해 두면, 기울기에 영향을 가장 크게 받으면서 떨어뜨리기 쉬워진다. 그래서 어제 가운데에 물품을 끼우는 전략을 재응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