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생각 기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EC May 10. 2024

쉽고 간단하게 얻으려는 사람들

뛰어난 작품은 "고난과 시련을 거친 뒤에 비로소 탄생한다."

가장 보잘것없다고 생각될 때 서로를 마주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의 성장 배경을 지켜볼 수 있는 철호의 기회로 작용한다.


SNS를 보면, 뚜렷한 결과가 보이는 이들에 한해서 정보를 얻고 주목받는 경우를 자주 접한다. 그를 대표하는 것이 직업이다. IT 개발자, 의료진, 교사, 공학자 심지어 교수님까지...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을 소셜 네트워크에서 접할 수 있다.


나 또한 그들을 팔로우하면서 빠른 정보를 간단하게 얻어가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럼에도 빠른 속도와 간단한 경로에는 간과되는 것이 있다고 느낀다.



이미 뚜렷한 결과를 보이는 대상을 지켜보는 것은, 미술관에 전시된 완성본을 감상하는 것과 같다. 그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예술가의 일생이 어땠는지 찾아보기보다는 완성된 결과물에 국한되어 생각하기 쉽다.


예술품을 수집하고 값어치를 따지는 것은, "예술가의 사본"에 대한 '대리 만족'에 머무를 뿐, 사본을 뽑아내는 예술가의 탄생에 대한 안목을 키워낼 수 없다. 유망한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예술가에게 일생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같이 찾아볼 필요가 있다.



고흐와 고갱의 일생을 백과사전에서 접면서 느낀다. 뛰어난 예술 거장의 작품성에는 "가장 힘들 법한 순간에도 묵묵히 작품을 완성한 그들의 '무언가'가 있다".


위의 두 거장이 비극적인 사건들과 힘든 고난 속에서도 여러 점의 작품을 완성하는 것을 보고 나는 감히 "창의적인 작품 속에는 남들이 겪어보지 않은, 고난과 그에 대한 남다른 시각이 있었다"라고 생각한다.



SNS에서 유망한 결과를 낸 인루언서를 팔로우하며 그들의 하는 말과 결과물을 지켜보는 것은, 예술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하는 것에 머무는 일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자신이 가장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될 때, 나와 비슷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비록 안정적이지 않다고 느껴질지 모르나, 그는 (점점 다가오기 힘들어지며, 지금이 아니면 다시 접하기 힘들어질) 사람 보는 안목을 키울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테니까.



[부록] 뛰어난 예술 거장들의 작품, 그가 탄생하기까지


1) 반 고흐

'반 고흐'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로부터 그림을 권유받았다. [위키피디아]


'반 고흐'는 심근 경색으로 아버지가 사망한 전후로도 정물화를 여러 점 남겼고

1886년에 안트베르펜의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회화와 드로잉 부문에 입학했을 당시,

파격적인 화풍과 정규 교육에 대한 반골성향으로 학교 원장이자 회화 교수와 마찰을 빚었고

밀로의 비너스를 그리는 수업시간에 지도 교수와 큰 갈등을 겪으며 학교를 수업에 참석하지 않고 유급을 당하는 일화가 있다.

그러한 사회의 인식 속에서도 고흐는 타협하지 않았으며

1887년 '폴 고갱'과 친구가 되었고 1888년 2월 2년 동안 200점 이상의 그림을 그렸다.

별이 빛나는 밤, 15송이 해바라기가 있는 꽃병, 붓꽃, 밤의 카페테라스, 아름의 침실, 자화상

위 작품들은 고흐의 대표작 중 일부로 꼽히는데, 제작시기는 다음과 같다.

별이 빛나는 밤: 1889년 6월–1889년 6월

15송이 해바라기가 있는 꽃병: 1888년 8월

노란 배경을 한 붓꽃 화병: 1889년

밤의 카페테라스: 1888년 9월–1888년 9월 16일

아름의 침실: 1888년–1888년 10월

자화상: 1889년 9월

그 외의 대표작들 중에 다수가 1886년 아카데미를 떠나 파리로 이사를 간 뒤에

그가 사망(1890년) 하기 전 시기에 탄생한 것으로 나온다.


https://ko.wikipedia.org/wiki/%EB%B9%88%EC%84%BC%ED%8A%B8_%EB%B0%98_%EA%B3%A0%ED%9D%90#cite_note-FOOTNOTETralbaut1981154-72


2) 폴 고갱

파리에서 고독한 시간을 보낸 고갱은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1886년 6월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사를 감.

그곳에서 고갱 특유의 장식적인 화법을 지향하였고 토속적인 토기류 도자기 제작에도 관심을 가졌고, 이 시기의 작품은 후일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888년:

설교 후의 환상

1889년: 우정이 돈독했던 '반 고흐'가 귀를 자르는 사건(1888년 12월 23일)

황색 그리스도

1897년: 건강 악화와 딸이 폐렴으로 죽음, 빚 독촉이 겹친 시기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https://ko.wikipedia.org/wiki/%ED%8F%B4_%EA%B3%A0%EA%B0%B1


+) 피카소

'피카소'는 역량이 뛰어남에도 학교 수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미술관을 매일 다니다시피했다. [두산백과사전]


'피카소'의 경우는 당시의 요절한 화가들에 비하면 단기간에 명성을 얻긴 했지만,

그가 있기까지 인내와 혼란의 과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0년 19세에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했을 때,

인상파들의 작품과 원시주의, 열정적 표현주의 등의 영향을 받았지만, 당시 그는 세계적인 도시 파리의 모습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화려함의 이면에 가려진 빈곤과 비참함을 목격하였고, 질병과 성병이 가득한 도시의 가난을 두려워했다.

자살을 결심하기도 했으며  파리의 구석진 다락방에서 추위와 가난을 인내하며 지냈다.

그렇게 20세에 첫 전시회를 열었고 피카소는 파의 비참한 생활상에 주목하여 거지와 가난한 가족 등을 그렸다. 이때를 피카소의 '청색시대'라고 부른다.

또한 파리에서 동고동락하면서 지낸 절친한 친구가 비극적인 자살을 함으로써 그의 충격은 더했다.

1903년에 제작된 《인생》은 당시 혼란스러웠던 피카소의 감정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52555


이들 모두 비극적인 환경에서도 여러 예술 작품을 남겼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꼬투리 잡기 좋아하는 사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