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 전에 내 가족사를 조금 풀어야 할 것 같다. 내 아버지는 내가 4살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아버지 나이로 31세 때였다. 만취한 상태로 길을 걷다가 트럭에 치이셨다고 한다. 그래서내가 그분에 대해 아는 내용은 건조한 사실적시된 내용뿐이다. 아버지는 영화 일을 하셨다. 연극도 하셨다. 외국어대를 다니셨다 정도. 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아버지의 성격이 불같고, 술을 좋아하셨고, 엄마를 너무 좋아해 따라다녔다는 사실은 다 주변인에게 들은 것이다. 그런 '인간적인' 아버지에 대해, 나는 잘 모른다.
그러다 아버지를 마주쳤다. 1988년도 영화 <성공시대>였다. 아버지가 왜 거기서 나오세요? 처음으로 본 인간적인 아버지의 모습은 조금 생소했다. 영상진흥원에 DB로 저장된 아버지의 이름 옆에는 (추정)이라는 태그가 달려 있었다. 그래도 나는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매년 기일마다 영정사진으로 근 30년을 본 얼굴이다. 그러나 사진 속 굳은 얼굴 말고 얼굴 근육이 움직이는 아버지를 본 건 난생처음이었다. 신기해서 아버지가 나오는 부분을 계속 돌려봤다. 야! 아버지가 움직인다!
나에게 아버지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조금 거칠게 말해서 유전자 제공자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충분히 엄격한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했고 (대신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은 약간 포기하셨다) 우리는 속칭 애비 없는 자식들과는 약간 거리가 먼 나름대로 좋은 인생을 살았으니까. 인생에 부침이 있어도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았을 걸' 같은 호랑말코 같은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아버지란 내 인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진 장외주식 같은 것이었다.
그러다 언젠가 <인터스텔라>를 봤다. 상대성 이론 때문에 우주로 여행을 떠난 아버지의 나이는 그대로인데 지구에 남아있는 자식들의 나이가 점점 변한다. 아버지는 그대로인데 아들이 소년에서 장년이 되고 죽는 것을 지켜본다. 그 씬에서 나는 웬일인지 많이 울었던 것 같다. 문득 내 아버지가 불쌍해 견딜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아버지가 인간으로 보였다. 이제는 아버지가 나보다 어리니까 같이 만나면 밥을 한 끼 하면서 술잔을 기울일 수 있을 텐데. 재미난 이야기도 많이 할 수 있을 텐데. 나는 영화를 보고 돌아가는 시점에 엄마에게 아버지가 생전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국수라고 했다. 그 이후 나는 제사를 지낼 수 없을 때마다 국수를 한 사발 말아 소주와 함께 영정사진을 켜놓으며 같이 먹었다. 그렇지만 이번부터는 영상 속 아버지를 대신 켜 놓을 것 같다.
기록은 증명을 만든다. 이 세상에, 아버지는 한 때 살아있었다. 그 사실이 못 견디게 서러워졌다.
부디 이 글이 제 아버지에게도 위로가 되는 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라이킷, 구독, 댓글로 각자의 아버지에 대한 소회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