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때 자퇴를 했다. 가족들과 떨어져 강남에 있는 고시원에 살다가 오피스텔로 옮겨 혼자 살았다.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을 갈 준비를 했다. 몇 개의 재수학원을 전전했고 곧 대학교에 갔다.
만약 자기소개서를 쓰게 된다면 문장은 이 정도로 압축된다. 그러나 나의 기억 속 그날들은 그렇게 남아있지 않다. 지독하게 쓸쓸했던 10대 후반은 기록해 보자면 이렇다.
자퇴를 한 이유는 부적응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 당시 학교 친구들은 나에게 상냥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굳어진 왕따 생활로 나는 사람들을 쉬이 믿지 못했다. 따돌림 상처의 생존전략 (brunch.co.kr) 그러다가 첫사랑을 심하게 앓으면서 가출을 했다. 02화 첫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이유 (brunch.co.kr) 아무튼 그런 복닥 복닥 한 이유로 학교를 중퇴했다. 아직도 후회하는 일은 아니다. 고등학교 3학년을 덜 다녔다는 것이고 나는 고등학교에서 재수학원으로 장소만 바뀐 채 입시를 계속했었으니까.
처음으로 간 곳은 한티 백화점에 붙어있는 작은 고시원이었다. 이만 원을 주고 일부러 창문이 있는 방을 골랐다. 좁은 방이었지만 아늑했다. 테트리스로 짐을 쌓아놓고 첫날밤을 자고 일어나니 온몸이 가려운 그런 방. 재수학원으로 가면서 이 엿같은 고시원 소리를 했다. 그러나 그 고시원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고시원 앞에는 작은 헌책방이 있었는데 나는 쉬는 시간마다 그 헌책방에 갔다. 세월을 먹어 누렇게 변한 책들을 몇 권 들춰보는 건 유일한 낙이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오래가지 못하고 곧 고시원을 나왔다.
나는 아침이 되면 교복을 입고 학교를 가는 동갑내기 학생들 사이로 평상복을 입고 재수학원에 갔다.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다. 수학의 정석을 봤는데 아는 문제가 없었다. 친구를 만들기에는 또래가 없었고 재수생들은 나를 본체만 체 했다. 친구를 불러내 놀기에는 노트북과 핸드폰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나는 10대고, 혼자 살고, 외톨이였다. 그래서 <캐스트 어웨이> 윌슨같이 선풍기에 이름을 붙여주고 대화를 했다. 오피스텔이 강남에 있어선지 밤이 되면 취객으로 시끄러웠다. 나는 어질거리는 잡음과 불빛들이 일렁이는 강남 한 복판에 있었다. 선풍기와 대화하다 말고 그런 생각을 아주 많이 했던 것 같다. 있지 선풍기야, 나도 저 사람들처럼 술을 마실 수 있으면 좋았을걸.
어머니가 나를 혼자 살게 한 건 내가 미워서가 아니었다. 복잡한 이유지만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했다. 그걸 믿게 된 계기가 있다. 어느 날인가 잔뜩 지쳐서 학원에서 돌아와 보니 오피스텔에 어머니가 계셨다. 제희야 밥 먹으러 가자. 따라간 곳은 보신탕집이었다. 나는 배가 너무 고팠다. 평소에 라면 같은 걸로 대충 때웠는데 국밥이라니. 게걸스럽게 보신탕과 파절이 김치를 먹었다. 아직도 보신탕을 생각하면 강남 어느 후미진 보신탕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보신탕을 먹은 기억이 난다. 보신탕에 대한 호오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처음으로 어머니와 이어주는 매개체다. 이전까지 어머니는 나와 단 둘이 밥을 따로 나와 먹은 기억이 없었다. 나에게 최소한 이 정도의 시간을 써 주는 사람이구나. 그때부터 어머니에게 마음을 열었던 것 같다.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검정고시를 봐야 했다. 검정고시는 쉬웠다. 다 풀고 잤다. 고사장에 가니 머리가 빨갛고 노란 언니들이 껌을 짝짝 씹으면서 수학 때문에 몇 번이나 검정고시에 떨어졌다는 한탄을 했다. 그 소리를 듣고 약간 쫄았는데 고등학교 수준이 아니라 중학교 수준이었다. 한참을 자고 있는데 뒤통수가 따가웠다. 내 등 뒤에 앉아있던 할아버지가 내 문제지 해답을 열심히 베껴 쓰고 계셨다. 하지만 저는 가형이고 할아버님은 나형인데요, 나는 그 할아버지에게 아직도 미안하다. 실컷 시험장에서 풀고 졸았는데 집에 와서도 미친 듯이 졸렸다. 그날은 혼자 컵라면을 먹고 잤다.
그 시절 나는 왜 나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지 많이 생각했다. 나는 내가 혼자 살고 있으니 어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어른은 모든 것을 참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을 관성처럼 참아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들은 외로운 겨울의 탄산 냄새가 섞인 공기 속을 혼자 걷는 일, 배가 너무 아파서 구역질을 하는데 아무에게도 연락할 수단이 없어 오피스텔에 기어 들어와 엉엉 울었던 날, 친구들이 너무 보고 싶고 첫사랑이 빼곡히 사무치던 일. 나의 열아홉은 그런 쓸쓸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때의 나는 인생이 평생 이럴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내가 열아홉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나는 네가 서른넷이 돼도 어른이 될 수 없다고 위로해주고 싶다. 그 당시의 나에게 지금 돌아간다면 네 인생은 앞으로 비참함과 황홀함으로 가득 차 있다고, 지금의 인생 궤도가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괜찮아, 괜찮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