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슬 Jan 23. 2023

Epilogue

장애, 나의 일부

뇌병변 (혹은 뇌성마비), 그 중에서도 경직성 하지마비 (spastic diplegia). 굳이 내 장애를 의학적으로 분류하자면 이렇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두 돌 때 장애를 가지게 된 탓에 판정 당시의 기억은 내게 남아 있지 않고, 알고 싶지도 않다. 나중에 커서 들은 이야기지만, 오히려 장애를 가지게 된 당사자인 나보다 부모님께서 (어린 나 몰래) 더 힘들어하셨다고 한다. 세상에 그 어느 부모가 장애가 있는 자식을 키울 의도를 가지고 아이를 낳았겠는가. 내 발달 단계가 또래에 비해 더디다고는 생각하셨다지만, 그게 '장애'라는 이름으로 확인사살되었을 때 부모님의 세상은 한 차례 무너졌다. 시간이 걸렸지만 부모님께서는 차차 나의 장애를 받아들이셨고, 그때부터 부모님의 시선 역시도 180도 바뀌었다. 나는 돌 때 혼자 몸을 가누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부모님께서는 돌잔치 대신 친척들과의 한 끼 식사를 택하셨다. 자칫 돌잔치 도중 몸을 가누지 못해 다칠 수도 있었고, 여러 모로 그 당시의 어린 나에게 스트레스가 될 것이라 판단하셨다고 한다. 가족여행을 갈 때면 휠체어로 다닐 수 있을 만한 관광지와 실내에서 즐길 수 있는 활동이 우선순위였다. 이 시리즈를 통해 내가 스스로의 장애를 통해 배운 점들을 서술했지만, 사실 이는 우리 가족이 나로 인해 함께 세상을 새로 배워나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족들과는 달리 나는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내 장애가 영구적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부모님께 내 장애에 관해 여쭤보면 "재활치료를 열심히 받아서 다시 장애 판정을 받을 수 있고, 장애 등급이 오르거나 아예 필요 없어질 수도 있다"는 답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때문에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 소아치료실을 떠나 성인재활치료실로 옮겨졌을 때도 '그저 소아에 있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 그런 것이라 여겼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어린 마음에 스무 살이 되면, 그러니까 법적으로 성인이 되면 자연스럽게 장애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현실은 어림도 없었지만. 오히려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때는 고등학교 시절 내내 입시를 이유로 학업에만 매진하는 바람에 삼 년간 치료를 쉬고 있는 상황이었던지라, 몸 상태가 나빠질 대로 나빠져 있었다. 내가 스무 살에 걸고 있었던 모든 희망이 산산조각났고, 현실을 직시하면서 한동안 혼란스러운 시간을 맞이하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도 장애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건, 장애가 평생 동안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나의 일부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어릴 때는 부모님의 품 안에서, 또 학교 울타리 안에서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왔는데, 앞으로의 내 인생은 어쩌지?


걱정은 걱정을 낳았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 걱정은 영국으로 와서 나름대로 자립한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국제 분쟁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구조적인 불평등을 해소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나에게, 국제공무원 (UN) 혹은 국제개발협력 종사자는 꿈의 직업이었었다. 과거형으로 적는 이유는.... 직업 조사를 하면 할수록 이 두 개의 직군이 모두 현장에서 직접 뛰어야 하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내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현장에 파견된 건데, 오히려 내 장애 때문에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현장에 파견되어 현지 사무소 내에서만 근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현재의 나는 무조건 국제기구 / 국제개발협력에서만 일할 것이라는 좁은 로드맵을 버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내가 진정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고 있다. 직업 선정에 있어서는 조금 더 신중해졌다. 예전처럼 내 관심사만 무작정 고려할 수 없게 됐고, 현실적으로 해당 직업을 갖게 되었을 때 정말 휠체어를 타고 일할 수 있을지를 따져 봐야 했다. 

어머니께서는 내게 '나만이 할 수 있는, 나의 고유성이 유효한' 일을 하라고 조언해 주셨다. 나의 학업적인 관심사는 변하지 않았기에 국제공무원으로 일하지 않더라도 비슷한 관련 분야 (혹은 학문)에 종사하게 될 것 같기는 한데... 장애가 나의 일부가 된 이제는 직업을 고르고 준비하는 데에 있어서도 참 사소한 부분들까지 고려해야 되는구나 싶어 조금 슬프기도 하다. 이건 스스로 한계를 지어버린다기보다는, 현실적으로 휠체어를 타고 일할 수 있는 직장인지, 몸을 써야 하는 업무가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장애를 가진 직원에 대한 사내 분위기도 중요할 테고.


장애를 온전히 나의 일부로 받아들였을 때 가지게 되는 고민들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분명히 또 다시 장애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한 사회적 인격체로서 성장할 것이다. 어떤 일을 앞으로 겪게 되든, 또 그 과정에서 다른 이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든, 오늘의 이한슬보다 내일의 이한슬이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있기를 바라며!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사회 환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