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고등학교 때 매킨토시 컴퓨터를 마련하고 나서부터는 내 생활의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서점에서 컴퓨터 잡지들을 사다 보기 시작했고 거기서 알게 된 모뎀이란 것도 구매했다. 당시는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에 잡지에 인쇄된 구매 신청서를 작성해서 우체국에서 산 우편환과 동봉해 부치고 한 달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우편환은 현금과 같았기 때문에 사실 마음먹고 사기를 치려면 돈만 받고 물건을 보내주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식으로 내 기준에서는 상당히 비쌌던 물건들을 몇 번 구매했다. 어린 마음에도 역시 북미는 신뢰의 사회구나 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2000년대 후반까지도 길거리의 무료 신문 가판대에는 컴퓨터 신문들이 있었다. 내용의 절반은 광고였고 기사들은 대부분 인터넷에 이미 올라온 것들이었지만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컴퓨터 부품 가격들을 알려면 신문을 보는 게 가장 빨랐다. 이런 컴퓨터 무가지들은 빠른 인터넷과 아마존이 득세하면서 자취를 감췄다.
어느 날 신문을 훑어보던 중 지면 하단의 작은 광고가 눈길을 끌었다. BC주의 애플 매킨토시 유저 동호회가 회원들을 모집하는 작은 광고였다. 나는 광고에 난 전화번호로 동호회의 전자게시판을 접속했고 몇몇 사람들과 인사를 했다. 그들은 나에게 시간이 되면 오프라인 모임에도 나오라고 했다.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왠지 가면 나처럼 컴퓨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임 장소는 버스를 타고 가기에는 너무 멀었다. 아버지에게 동호회 모임을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하자 아버지는 선뜻 데려다주었다. 아버지는 인맥은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집에만 처박혀 살다가 갑자기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보겠다 하는 아들을 도와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쌀쌀한 초겨울 밤에 모임 장소로 향했다. 어느 오래된 교회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보이는 사람들은 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었다. 동호회의 전자게시판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눈 Beth라는 총무는 50이 넘은 백인 아줌마였다. 잘못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또래의 사람들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처음 왔다고 인사를 하자 Beth는 사람들에게 내 소개를 했고 내 주위로 몇몇 아저씨들이 모여들었다. 안녕 나는 앤드류야, 잘 부탁해. 안녕 나는 제이슨이야, 애플 II 때부터 컴퓨터를 썼지, 넌 뭘 쓰니? 하면서 체크무늬 남방과 조잡한 무늬의 스웨터를 입은 덩치 큰 중년의 아저씨들이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나도 쭈뼛거리면서 "나는 이민 온 지 2년 정도 됐고 요번에 새로 나온 LC라는 걸 샀어. 애플 모니터도 같이 세트로 샀지" 하고 말문을 열자 아저씨들은 탄성을 지르며 아! LC! 그거 이쁘더라. 칩도 최신형이야, 모토로라 68020을 쓰지. 돈 좀 더 주고 보조프로세서를 달면 엄청 빠르다구. 하면서 자기네들끼리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의 앞에 있는 영어가 서투른 비실한 동양소년이 자기들보다 30살은 어리다는 사실을 별로 개의치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나는 동호회에 자주 참석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모임에 내 또래는 없고 다들 중년의 아저씨 아줌마들만 있다는 사실에 실망했고, 그 사람들이 나한테 말을 걸어준다는 것에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애랑 얘기할 게 뭐가 있다고. 아버지는 무슨 동호회길래 애도 상대해 주는 건가 궁금해했다. 하긴 한국이었다면 나이 먹은 사람들이 이것저것 부려먹기만 했을 것이다. 여기서도 새로 이민 온 사람들이 동창회 모임 같은 데 가면 제일 어린 사람들은 하루종일 고기나 굽다가 온다. 한국 사람들은 늙으면 맨날 남에게 뭘 시키고 싶어지는 모양이다. 당시의 나도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시키지도 않은 의자 정리나 잡일을 도왔고 사람들은 매번 그런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모임에서는 아저씨 아주머니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누군가가 신형 매킨토시를 집에서 가지고 오면 구경도 했다. 당시 2만 달러가 넘는 넥스트의 워크스테이션도 거기서 처음 보았다. 나는 언제 저렇게 비싼 컴퓨터를 만져볼 수 있을까 궁금했다. 지금의 스마트폰보다 느린 컴퓨터였지만 당시로는 엄청난 물건이었다. 회원들 중에는 여든이 넘은 할머니도 있었다. 베스 아줌마는 내가 어른들에게 미스터나 미세스라고 존칭을 붙이는 걸 보고 "나 정도 나이 먹은 사람들까지는 그냥 퍼스트 네임으로 불러, 우리는 다 친구잖아, 저렇게 연세 많은 분들만 미세스라고 불러드리면 돼"라고 조언했다. 캐나다인들은 고등학생 정도의 아이들은 성인 대접을 해 주었다. 내 경험으로 한국 사람들은 청소년들을 애들이라고 무시하거나 유난스레 과보호를 하거나 둘 중 하나이지만 동등한 인격체로 취급하는 경우는 많이 보지 못했다. 아직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하면 "어디서 애들이 어른 말씀하시는데 끼냐"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꼬박꼬박 말대답하는 버릇없는 놈" 같은 말을 예사로 하던 시절이었다. 사실 나이로 남을 찍어 누르는 것처럼 편한 것도 없다. 어릴 적에는 그게 부당하다 생각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득을 보기 때문에 다들 점점 꼰대가 되어간다. 하긴 나이를 처먹어가지고 애들이 하는 말 하나도 제대로 받아치지 못하고 윽박지르는 게 무슨 어른인가. 한국은 많은 것이 변했지만 아직도 사람들이 연장자나 상관 앞에서 자기 할 말을 하지 못하는 건 여전하다. 그리고 한국의 노인 인구는 무서운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그러면서도 미래에는 창의적인 인재가 필요하다고 난리다. 앞으로 창의적인 노인들이 많아진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그럴 일은 없어 보인다.
사실 나이를 먹는다고 어느 순간부터 자주적인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 주위의 사람들은 이제 쉰이 다 되어가도 "부모님께서 이렇게 하라셔서" 혹은 "오빠가 그러는데 나는 이렇게 해야 한대" 같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솔직히 말해서 남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이 제일 편한 사람들이 있다. 모두가 독립적인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건 아니다. 그게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단순노동이 많던 옛날에는 사사건건 따지고 대드는 아랫것들은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외국처럼 창의적인 인재가 필요하다면서 한국식 마인드는 고수해야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문화란 건 입에 맞는 것만 들여와서 쏙쏙 빼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20대 직장생활 시절 인턴과 같이 일할 기회가 있었다. 인턴은 전형적인 유대인이었고 자기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인턴을 했었다고 틈만 나면 자랑을 했다. 인턴은 시건방지게도 수석 엔지니어의 코드 디자인에 문제가 있다고 컴플레인을 했다. 이건 다 다시 처음부터 디자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참 개발자들의 가장 흔한 실수는 현재의 설계가 왜 이렇게 되어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 뒤집어엎고 새로 시작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믿는다. 딱히 개발 분야가 아니라 정치나 사회도 지금 걸 다 박살내고 새로 다시 시작하면 훨씬 나아질 거라 믿는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보나 마나 저놈은 잘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석 엔지니어는 인턴에게 디자인이 왜 이렇게 되어 있는지 많은 시간을 들여서 설명했다. 물론 인턴은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애송이답게 다 이해하지 못했고 수석은 그에게 "여기선 내가 상관이고 내가 책임을 지는 거니 이건 내 결정이다, 회사란 건 그렇게 돌아가는 거다"라고 못 박아 주었다. 그러나 어떤 부분들은 인턴의 주장대로 바꾸기도 했다. 한국이라면 어땠을까. 나는 그에게 뭐 하러 시간 들여서 그걸 하나하나 가르쳐 줘요? 하고 물었고 수석은 "그래야 쟤가 배우는 게 있을 거 아니야. 여기서 잘 배우고 학교로 돌아가면 우리 회사 평판에도 영향을 미쳐. 그리고 저런 애가 경험을 잘 쌓고 나서 졸업하고 우리 회사에 다시 들어오면 이득이야." 하지만 북미도 이제 다음 분기 실적만 신경 쓰는 쪽으로 분위기가 바뀌어서, 그렇게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 무렵 아버지의 샌드위치 가게는 점점 매상이 줄어들고 있었지만 부모님은 가게를 팔 생각이 없었다. 살 사람도 없었을뿐더러 매달 줄어가는 매상을 바라보면서 매일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이 하던 일을 그만두고 새로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는 것보다 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가게를 그만두어야 했다. 우리에게 가게를 판 여자가 예전에 가게를 담보로 돈을 빌렸는데, 그것 때문에 은행에서 압류가 들어온 것이다. 이런 경우에 대비해서 캐나다에서 부동산을 매매할 때에는 꼭 변호사가 등기부를 조회하지만 우리가 고용한 변호사가 제대로 조회를 하지 않았다. 이런 일은 당시에 자주 있었다. 우리는 가게 재고 값으로 6천 불만 받고 나가야 했다. 아버지는 이것은 명백한 변호사의 직무유기이므로 소송을 걸어서 보상금을 받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맞는 말이었다.
아버지는 수소문을 해서 하버드 법대를 나온 변호사와 상담예약을 잡았다. 아버지의 영어실력은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변호사의 말을 모두 다 이해할 정도는 아니어서 나를 데리고 갔다. 나는 당시 11학년이었다. 아버지는 다른 한국 사람들처럼 변호사 앞에서 하소연을 하지도 않았고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변호사가 이해하기 쉽게 그간의 자초지종을 영어로 쓴 서류를 건넸다. 해외업무를 오랫동안 하면서 터득한 경험이었다. 변호사는 아버지의 보고서를 읽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확실히 변호사가 잘못한 건 맞다. 그런데 이건 변호사가 변호사를 고소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밴쿠버 바닥은 좁기 때문에 서로서로 다 아는 사이다. 누가 동료를 고소하려 들까? 그리고 이긴다 해도 피해보상 액수가 1달러일 경우도 있다. 이 사람이 잘못을 한 것과 그 잘못이 당신에게 얼마만큼의 피해를 입혔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당신은 이 고소를 진행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아버지는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통해 이런저런 질문을 했고, 나는 중간에서 통역을 했다. 40이 훨씬 넘은 아저씨 둘이 중간에 열여섯 살 소년을 두고 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광경은 기묘했다. 이민자의 아이들은 한국에 있었더라면 걱정하지 않았을 일들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우리 집 등기는 제대로 되었을까, 어머니의 부인과 검사결과는 잘 나왔을까, 저번에 해지한 유선방송 수신료는 왜 또 청구되었을까. 부모들은 자식이 영어를 더 잘하니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이들은 생각보다 어른들이란 그리 대단한 사람들이 아님을 아주 일찍 알게 된다.
아버지는 내가 뭘 물어보면 납득할 때까지 자세하게 설명을 했다. 아버지는 선생님 체질이었다. 내가 무언가를 질문하면 대답은 항상 자세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나에게 의견을 묻거나 모르는 걸 물어보는 일이 잦았는데, "그건 이러이러합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러냐, 그럼 이렇게 해야겠구나" 하고 나의 의견을 경청했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뭘 물어보거나 내 주장을 이야기하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았고 간혹 "쪼그만 게 뭘 안다고" 하는 식으로 대답하는 어른을 보게 되면 "아 저 사람은 좀 무식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른들이 짜증나기는 했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가족 간의 위계질서나 예의범절은 매우 중시했지만 가족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직장상사나 학교선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존칭을 절대 쓰지 않았다. 나도 그래서 옛날부터 집에서는 학교 선생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존칭을 붙이지 않았다. '수학 선생이 그랬어요' 하면 부모님은 '그러냐' 하고 끄덕거릴 뿐 존댓말을 써야 한다거나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집에서도 깍듯이 "사장님께서 오늘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그런 건 좀 우스꽝스럽다. 누군가를 받들어 모셔야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들이 한국에는 생각보다 많이 있다. 그래서 연예인이나 목사들이 득세하는 건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사촌들 중에는 허황된 보약 같은 걸 만들어 파는 사람이 있었다. 이모할머니의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할머니는 항상 그 아들을 애지중지했고 과보호를 받는 자식들이 대개 그렇듯 주제파악을 하지 못해서 성인이 되고 나서도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언젠가 설날에 그 집에 세배를 갔었다. 아저씨는 자기가 온갖 연구 끝에 개발한 물건이라면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진흙과 자석가루를 섞은 연고였다. 이걸 바르거나 심지어는 쥐고 있기만 해도 몸에 힘이 넘친다는 것이었다. 곧 큰 제약회사와 계약할 거라고 아저씨는 희망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시연을 하겠다면서 고모들 손에 연고를 바르고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라고 하였다. 아저씨는 고모들의 손가락을 잡아 펴면서 "이거 봐, 이거 바르니까 훨씬 힘이 나잖아" 하면서 의기양양했다. 아저씨는 나에게도 약의 효능을 보여주겠다고 했고 나는 아저씨가 하라는 대로 했지만 왠지 약을 바르자 기운이 더 빠지는 거 같았다. "저는 힘이 더 빠지는데요"라고 말하자 아저씨의 얼굴에는 실망감이 올라왔고 고모들은 이모할머니의 눈치를 보면서 "어른 앞에서 장난치면 못써" 하면서 나에게 야단을 쳤다. 하지만 아버지는 딴 데를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수도꼭지에 끼우면 나쁜 물질을 걸러준다는 자석 두개를 받아 가지고 집을 나섰다.
고모들도 아저씨가 말도 안 되는 헛지랄을 하고 있다는 건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이었기 때문에 바른말을 하지 못했고, 어린애가 그러는 건 예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남에게서 정신 차리라는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아저씨는 그런 엉터리 건강제품만 만들어 팔면서 가난을 면치 못했다. 아저씨는 60이 넘자 중풍에 걸렸고 가족들을 몇 년 동안 고생시키다가 죽었다. 나는 아마 아저씨에게 바른말을 한 유일한 친척이었을 것이다. 때로는 아이들의 말을 귀담아듣는 것도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