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고요한 Jun 20. 2022

<브로커> 설득에 실패한 '그렇게 어머니가 된다'

Broker, 2022

<브로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는 어느 밤. 소영(이지은)은 베이비박스 앞에 아이를 두고 떠난다. 다음 날, 마음이 바뀐 소영이 아이를 찾으러 돌아오지만, 시설에는 접수된 아이가 없다. 세탁소를 운영하지만 빚에 쪼들리는 상현(송강호)과 베이비박스 시설에서 일하는 보육원 출신의 동수(강동원)가 아이를 빼돌린 것. 경찰에 신고하려는 소영에게 두 사람은 어차피 버린 아이이니 잘 키워줄 적임자를 찾고 돈을 나눠 갖자고 제안한다. 한편 이를 모두 지켜본 형사 수진(배두나)와 후배 이형사(이주영)는 이들을 현행범으로 체포하려고 뒤를 쫓는다.


<브로커>는 진입장벽이 높다. 일본 감독이 만든 한국 영화라거나 120분 동안 잔잔하게 진행되는 예술영화라는 이유는 아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전작들에 대한 이해가 빠지면 영화가 던지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없는 탓이다. 특히 2008년 작품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2018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어느 가족>은 <브로커>를 구성하는 피와 뼈다.


인터뷰에 따르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임신과 출산으로 형성되는 모성애와 달리 부성애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영화라고 한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후 모성애도 생물학적인 출산으로 바로 형성되는 건 아니라는 비판을 들었고 그에 공감해서 <브로커>를 기획했다고 한다. <어느 가족>은 혈연이 아닌 사람들이 모여 대안 가족을 이룬다.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히로카즈 감독의 오랜 테마를 다시 끌어온 작품이다. 그렇게 모인 대안 가족이 불법적, 비윤리적 행동으로 한다는 점에서 <브로커>와 유사하다.



■ 건조한 헤드라인에 피와 살을 붙여온 고레에다의 작품 세계


법망을 피해 비윤리적인 상황에 처한 공동체는 고레에다를 통해 최후의 변론 기회를 갖는다.  <브로커>의 클라이막스에서 동수와 소영은 함께 놀이공원 관람차에 탄다. 관람차의 정상에 이를 무렵 동수가 소영의 눈을 가려준다. 소영은 ‘TV에 나올 때 이런 모습이겠다’라는 말을 한다. 아이의 친부를 살해한 살인자이자 동시에 영아를 유기한 파렴치하고 무책임한 엄마로 포토라인에 서는 모습을 떠올린 것이다.


고레에다 감독은 이처럼 신문 사회면에 짤막하게 나올 법한 건조한 헤드라인에 피와 살을 붙여 사람의 형상을 만든다. 엄마가 방치하고 간 아이들이 지옥같은 생활을 이어오다가 끔찍한 사건을 저지른다(<아무도 모른다>). 조산원에서 두 가정의 신생아가 바뀌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부모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참담하고 끔찍한 문장이 고레에다의 손을 거쳐 사람의 이야기로 거듭나고 저마다의 질문을 갖고 다시 사람의 형상으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이 이야기 속에는 무조건적인 악역이 없는 대신 개인적인 비극 속에서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들이 되물어진다.


그런데 <어느 가족>에서 삐끗했던 고레에다의 손길이 <브로커>에서는 확실히 어긋난 것처럼 보인다. <아무도 모른다>는 스스로 책임질 수 없고 사회적 보호 속에 자라나야 하는 아이들이 방치될 때 벌어질 수 있는 피치못할 비극이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조산원 직원의 악의 때문에 부모와 아이들이 고통을 받는다. 갑자기 비극에 내던져진 평범한 시민이 변화하는 과정을 섣부른 판단없이 차분한 시선으로 그려내는 게 고레에다 감독의 특기다.


<어느 가족>, <브로커>는 다르다. 의무가 없거나 타의에 의해 발생한 비극에서 휴머니즘을 찾아가는 두 작품과 달리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사지멀쩡한 성인들이 영아유괴 및 인신매매, 시체유기, 성매매 등 평범한 시민은 상상하기 어려운 강력 범죄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설정부터 납득이 어렵다.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공감대가 커졌던 기존작품들과 달리 <브로커>에서 전사가 드러날 수록 행동에 물음표가 많아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보육원 출신인 동수는 자기를 두고 간 엄마를 기다리며 입양을 거부하다가 성인이 되어버렸다. 아이를 버린 40명 중의 1명은 돌아온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보육원에서 헛된 희망을 품으며 자랄 바에는 일찌감치 더 나은 부모를 찾아주는 게 낫다며 베이비박스에 들어온 아기를 사고판다는 설정이 이성적으로나 감성적으로 용납이 어렵다. 자기에겐 2.5% 희망이 절대적이지만 타인에겐 무가치하다는 걸까. 보육원 출신의 3%도 성공하지 못한다는 친구의 말에 그것도 높은 확률이라는 반박하는 것과 언행일치도 되지 않는다.


상현은 과거를 캐볼수록 악한이라는 생각을 뿌리기 어렵다. 아이 시절에 보육원에 방치된 동수와 달리 상현은 스스로 부모의 얼굴을 닮았다고 자조할 여유를 가졌다. 부인, 딸과 헤어져 사는 이유도 사회적 재난이나 불황이 아닌 도박 빚이 원인이다. 우성을 판 돈 3,000만 원만 있으면 재결합이 가능할 거란 꿈을 꾸지만, 가족해체의 원인이 오로지 금전 문제만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 와중에 스스로 ‘삼신 아저씨’라 칭하는 뻔뻔함까지 갖췄다. 송강호라는 대배우가 넉넉한 웃음과 소박한 유머로 극에 숨통을 터주지만 상현은 ‘누구나 사연이 있다’는 문장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인신매매범을 잡겠다며 살인범을 앞에 두고 함정수사를 펼치는 형사로써의 직업윤리에는 의문이 들지만, 오히려 개인사가 자세히 설명되지 않고 어렴풋하게 몇 가지 단서만 던져지는 수진에게 마음이 가는 건 이런 이유다. 어쨌든 수진은 브로커들과 동행 아닌 동행을 하며 자신의 가치관을 수정했고 극의 막판에는 가장 휴머니즘적인 선택을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아이가 팔리기를 가장 바라는 건 우리 같다’며 브로커들을 올려 치는 대사는 빠지는 게 더 좋았을 거다.



설득에 실패한 '그렇게 어머니가 된다'


처음부터 과녁을 벗어난 캐릭터로 중구난방 진행되는 <브로커>는 소영과 수진의 옥상 대면 장면에서 급기야 뼈대마저 무너지며 풀썩 주저앉는다. 영화 내내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버린 소영을 못마땅해하던 수진은 ‘키우지도 못할 거면서 왜 낳았냐’’며 소영을 몰아부친다. 소영은 ‘낳고 나서 버리는 것보다, 낳기 전에 죽이는 건 죄가 적냐’고 맞받아친다. 그리고 영화의 끝에 소영은 수진에게 아이를 맡기고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지켜진 아이’라고 말한다. 누구에게서 지켜진 아이인가.


서두에 설명한 것처럼 <브로커>는 ‘모성애를 타고나는 것처럼 그렸다’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기획된 작품이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갑자기 모성애의 발현에서 임신중절의 책임 문제로 전선을 확대한다. 물론 확대된 책임의 무게는 오로지 여성에게만 전가된다. 부성은 만들어지지만 모성은 회복되는 것이라는 어쩌면 고레에다의 진짜 시각일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에서 아버지들은 어떤 책임도 다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다. 아이를 버리거나 지키는 것도 고스란히 여성의 몫인 탓이다. 도박 빚에 몰려 가족에게 버림받고 영아 인신매매에 뛰어들거나, 성매매 후에 책임지지 못할 아이를 지우라고 임신중절을 강요하다가 살해당한다. 혹은 동수의 경우처럼 아예 존재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남성들이 책임에서 배제된 사이 문제는 오롯이 여성들의 선택 문제로 좁혀진다.


버림받고 상처 입은 아버지와 아들들은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어머니가 된 인물에게 치유받는다. 얼핏 보면 시간을 두고 차차 ‘그렇게 어머니가 된다’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그린 듯 하지만 자세히 보면 ‘어쨌든 어머니가 되어야만 한다’에 더 가까운 강박적 결론으로 치닫는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나온 대사가 맞을까 의심될 만큼 선명한 대사인 ‘태어나줘서 고마워’는 깜깜한 어둠에서 생명력을 상실하고 쉽게 휘발된다.



■ 고레에다가 영화를 찍으며 생각할 것


소설을 쓰면서 지유는 종종 시작점을 잊어버렸다. 어떤 생각이나 장면으로부터 소설이 시작된 것인지에 대해서. 이유는 분명 있었다. 그 소설을 써야만 한다고 결심하게 만든,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런 게 있었다는 것만 기억이 났다. (...) 이제 지유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잊어서는 안 되었던 무언가가 아니라, 중요한 것을 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_임솔아 『초파리 돌보기』 중에서


<브로커>는 다른 의미로도 진입장벽이 높은 영화다. 이율배반적인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려 노력한 배우들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브로커>의 세계는 외국 감독이 피상적으로 바라본 한국의 단면이라는 인상을 벗어나기 어렵다. 실험실에서 배양된 것처럼 유해하지만 치명적이지 않은 적당한 사건으로만 구성된 <브로커>의 인위적 세계는 더 큰 위화감을 준다.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담담하게 그려낸 고레에다의 시작점인 <원더풀 라이프>부터 그의 감독의 작품세계를 따라온 이들에게는 더욱더.


<어느 가족>으로 황금종려상을, <브로커>로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2020년도에도 여전히 평단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히로카즈 감독이지만 진짜 위기는 이제부터일지 모른다. 그가 오랫동안 탐구해온 가족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매몰되어 인간의 조건을 잊은 캐릭터들이 계속 등장한다면 말이다. 영화를 만들 이유를 생각해봐야 한다. 시작점으로 돌아가 보자. 마침 그가 낸 영화자서전의 제목 역시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아닌가.


#고요한영화 #실눈뜨기 #영화 #브로커 #고레에다히로카즈 #송강호 #강동원 #이지은 #배두나 #이주영

매거진의 이전글 <박쥐> 박찬욱과 송강호의 죽여주는 질문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