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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한 Mar 22. 2024

<파묘> 사실은 이걸 파내려고

Exhuma, 2024

<파묘> 예고편은 최민식의 대사로 시작한다. “여기 전부 다 알 거야. 묘 하나 잘못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영화 속 등장인물들에 하는 말이지만 동시에 관객에게 던지는 초대장이다. 신앙 유무와 관련 없이 풍수지리에 바탕으로 한 장례문화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벗어나기 어려운 영향력을 행사한다. 태어나자마자 울기만 하는 아이, 정신병원에서 목숨을 끊은 장손, 밤마다 헛것을 보는 할아버지까지. 미국 LA에 사는 밑도 끝도 없는 부자인 의뢰인의 집에 닥친 불행을 무당 화림(김고은), 법사 봉길(이도현)은 묘를 잘못 써서 생긴 묫바람이라고 진단한다. 나쁜 자리에 눕힌 조상이 불편을 호소한다는 거다.


두 사람이 묫바람을 잠재울 사람으로 떠올린 건 지관 김상덕(최민식). 40년간 땅을 파먹고 살았다는 그는 유력한 정·재계 인사들도 조언을 구한다는 유명한 풍수지리사다. 그리고 상덕과 함께 일하는 장의사 고영근(유해진)은 대통령을 염한 경력까지 있는 베테랑이다. 단번에 묫바람을 알아챈 무당과 법사. 베테랑 지관과 장의사의 소개가 순식간에 진행되며 <파묘>는 단숨에 관객들을 민간신앙의 세계로 몰아넣는다.



■ 믿음의 조각들


편의상 ‘오컬트’로 분류하지만, 믿을 수 없는 세계를 믿게 만드는 건 장재현 감독의 특기다. 데뷔작 <검은 사제들>은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의 걸작 <엑소시스트>로 유명해진 가톨릭의 구마 의식을 서울 한복판에서 매끈하게 구현했다. <사바하>는 불교의 미륵불 사상을 바탕으로 사회적 문제인 사이비종교의 실체와 신의 존재 의미를 묻는 기독교적 질문을 절묘하게 배합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전작들과 <파묘>가 같은 영화라고 볼 수는 없다.


<검은 사제들>에서는 보조 사제 최 아가토(강동원)에게 구마 의식을 하는 김 베드로 신부(김윤석)가 영신(박소담)에게 못된 일을 하고 있는지 감시하라는 교단의 비밀임무가 주어진다. <사바하>는 사이비종교를 고발하는 박 목사(이정재)가 진짜 메시아일지 모르는 사슴동산(=동방교)의 교주 김제석의 정체를 밝혀가는 과정이다. 전작의 주인공들은 신을 믿는 종교인이었지만 악마, 사후세계, 불로불사 등 믿을 수 없는 존재들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해 차차 믿음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반면 <파묘>는 확고한 믿음을 전제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장로까지 올라간 독실한 개신교 신자 영근조차 귀신을 달래는 무당들의 굿이나 배산임수를 논하는 풍수지리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의뢰인에게 ‘숨기는 게 있냐’고 계속 캐묻는 상덕처럼 영화는 ‘무엇’을 믿어야 할지 궁금해하는 오컬트적 영역보다 이 사건들이 ‘왜’ 일어나게 된 건지 원인을 찾는 미스터리의 영역에 더 깊숙이 발을 붙이고 있다.



따라서 ‘왜 파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내내 영화를 지탱한다. 후에 의뢰인이 파묘를 요청한 조상의 묘가 악질 친일파의 묘소임이 밝혀지지만 ‘악지 중의 악지’라며 잘못 손대면 지관부터 싸그리 줄초상난다며 거부하는 상덕을 설득하는 건 무당인 화림이다. 화림은 태어난 후부터 계속 울기만 하는 아이가 있다는 간곡한 요청에 눈을 돌릴 수 없다. 의뢰인의 죽은 자의 한을 풀어주고, 산자의 고통을 치유하는 게 무속인이라는 직업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왜 파야 하는가는 질문은 멈추지 않는다. 친일파의 묘 아래에 첩장된 묘는 일제시대의 유명한 음양사가 한반도의 척추를 끊어놓기 위해 심어놓은 쇠말뚝이 존재했다. 쇠말뚝의 정체는 전국시대 다이묘에게 저주를 걸어놓은 거대한 관이다. 땅에 묻힌 다이묘가 관에서 깨어나고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긴 이들이 포기하려 할 때 붙잡는 건 상덕이다. 흙에서 만물이 자라고 흙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지관은 땅이 망가진 채로 있는 걸 지켜볼 수 없다는 직업윤리가 발동했을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후손들이 살아갈 이 땅’이라는 노골적인 대사가 관객들의 집중력을 흩트릴 수는 있으나 캐릭터의 붕괴가 아니라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진 이들을 떠올린다면 당연한 결정이다. 무속신앙과 악령의 등장으로 <곡성>과 비교하는 경우도 있는데 온당치 않다. <곡성>은 관객이 오해하도록 의도적으로 혼란스러운 지점을 만들어 현혹해 믿음에 대한 의문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반면 앞서 말했듯 <파묘>의 믿음은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고 확실한 해답을 향해 나아간다.


■ 믿음의 쓰임


연민과 직업의식으로 <파묘>가 굳건히 지켜온 믿음의 쓰임새는 모든 사건이 종결된 후 에필로그에서 밝혀진다. 악한 정령을 해치우고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치유되지 않은 상흔이 남았다. 화림은 굿을 하다가 오니의 얼굴을 보고 깃발을 떨어뜨리고 봉길은 목발을 짚고 다닌다. 영근은 장례를 치르다가 시신이 눈을 깜빡이는 듯한 환상을 본다. 상덕은 수술 부위가 터져 피가 배어 나온다. 그렇다고 이들의 믿음이 상처만 남기고 끝난 거라고 할 수는 없다.


기독교 집안의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장재현 감독은 엘르와의 인터뷰에서 ‘인간이 죽고 나면 끝이라는 게 슬프기 때문에 귀신이 있었으면 좋겠다’며 ‘그냥 사라질 무기질이라면 고생하며 착하게 살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유 없이 악마에 쓰여 고통받는 영혼을 구하려던 <검은 사제들>, 비참한 죽음을 무력하게 바라봐야 했던 인간 조명한 <사바하>는 인간의 의지를 뛰어넘는 신의 섭리가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파묘>는 초현실적 세계를 다루고 있지만 인간의 의지에 의해 파생된 악을 인간의 힘으로 제압한다. 착하게 살 이유에 대한 확실한 답이다.


에필로그의 마지막은 상덕의 딸이 결혼하는 장면이다. 결혼 전에 임신한 딸은 독일 남자와 결혼한다. 가족들이 기념사진을 찍는 순간 상덕은 그 고난을 이겨냈으면 가족이랑 다를 게 없다며 영근, 화림, 봉길을 부른다. 과거의 상처는 쉬이 아물지 않지만 피를 나누지 않았어도, 다른 땅에서 살아왔더라도 종교와 인종을 뛰어넘어 하나의 가족이 되어 새로운 세대를 위해 힘을 뭉칠 수 있음을 카메라 셔터 소리로 대신 말한다. 아니 믿는다. 나는 이 믿음을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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