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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한 Apr 23. 2024

<삼체> 인류에게 가장 어울리는 문제를 출제하다

3 Body Problem, 2024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삼체문제(three-body problem)는 아이작 뉴턴의 저서 『프린키피아』에서 등장했다. 세 개의 물체 간의 상호작용과 움직임을 다루는 고전역학 문제로 태양, 지구, 달 세 천체의 궤도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되어 세 개의 물체가 중력을 주고받으며 움직이는 경우를 고민한다. 1890년 앙리 푸앵카레는 삼체문제의 일반해를 구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증명했다. 두 개의 천체는 예측이 쉽지만, 고작 하나의 변수만 추가되어도 궤도의 예측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에서 굳이 뉴턴의 삼체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뭘까. 드라마는 8부작이라는 빡빡한 러닝타임의 상당 부분, 특히 몰입도를 끌어내야 하는 초반부를 대폭 할애했다. 이 시간 동안 현재 인류의 과학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VR 기기를 이용한 게임으로 삼체문제의 일반해를 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두 가지 효과를 노린 듯 보인다. 삼체인들의 지구침공의 당위성위성 부여와 삼체인의 위기에 공감하는 인류 변절자의 양성이다.


엄청난 시각효과를 동반한 VR 게임은 흥미로운 스펙터클이기는 하다. 하지만 고작 실감 나는 게임으로 현대문명 최고의 지성들을 포섭한다는 설정은 다소 설득력이 부족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코스믹 호러만 표방했다면 H.P. 러브크래프트의 작품들처럼 삼체인의 속사정을 모르는 게 만드는 게 더 효율적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그들이 삼체 항성계에 살고 있다는 정보를 그렇게까지 전달할 필요는 없다. 반면 외계인에겐 과다한 정보일 수 있는 삼체문제가 지구인에게는 절박한 문제가 된다.



순수학문에 매진하는 사울(조반 아데포)은 촉망받는 젊은 물리학자지만 외계에서 난입한 입자 하나 때문에 그간 공들인 모든 연구의 근간이 무너지는 위기를 겪는다. 응용과학으로 방향을 틀어 나노섬유를 개발한 오기(에이사 곤살레스)는 엄청난 성공을 목전에 두고 결과물을 폐기한다. 음료와 스낵 사업가로 성공한 루니(존 브래들리)는 삼체 추종자의 포섭 요청을 거절하고 살해당한다. 게임기를 통해 삼체인의 비밀을 알게 되고 삼체에 대항할 팀에 합류하는 진(제스 홍)은 남자 친구인 라지와 헤어진다.


사울과 입자물리학, 오기와 나노섬유, 루니와 식음료 사업, 진과 라지의 안정적인 이차원적 관계에 삼체인의 등장이라는 하나의 변수가 투입되자 전혀 예상할 수 없던 궤도로 인생의 궤적이 변화한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 앞에 주인공들은 각각 학문적 성과, 직업윤리, 친구와의 우정, 연인과의 사랑을 어떻게 재정의할 것인지 고민한다. 훗날 삼체인에 맞설 계획을 세우는 면벽자(Wallfacer)로 선정되는 사울은 ‘(삼체인 등장)1년 전의 문제들이 사소하게 느껴질 만큼 어렵고 복잡한 문제에 직면했다’고 고백한다.


반면 변수가 없는 주인공들도 있다. 태양을 증폭기 삼아 우주로 전파를 쏘아 삼체인을 지구에 불러들여 모든 사단의 원인을 제공한 물리학자 예원제. 예원제를 도와 삼체인을 신처럼 모시는 숭배 조직을 만들고 포섭과 테러를 일삼는 에너지 재벌 마이크 에반스. 에반스의 행동대장으로 살인까지 하는 타티아나는 변수가 없으니, 궤도에 변화가 없다. 삼체 추종 세력만 변수가 없는 건 아니다. PDC(Planetary Defense Council, 행성방위이사회)의 수장이자 삼체에 대항하는 토마스 웨이드도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하던 일을 하면 될 뿐이다.



■ 삼체인의 치명적인 무기


삼체인들은 거짓말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서로의 의사소통 과정에 오해가 없다. 자신에게도 물론이다. 변수 없이 목표 달성을 위해 오직 전진하는 신념으로 가득한 이들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생길지 우려가 되어도 파격적인 결단을 내리는데도 일말의 주저함이 없다. 인풋이 곧 아웃풋으로 나오는 이들이 거짓을 모르고 인류를 벌레(You are bugs)라고 칭하며 공존을 거부한 삼체인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반문하게 된다.


삼체인이 인류에게 공존할 수 없음을 선포하는 이유는 의외다. 거짓말을 하는 너희 인류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예원제가 인류에게 실망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던 중국의 문화혁명과 같은 논리구조이다. 구세계를 쳐부수고 신세계를 이룩하자던 문화혁명은 얼핏 거짓을 타파하고 진실을 추구하자는 혁신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거짓된 단 하나의 이념을 위해 진실된 다양한 사실들을 파괴하는 자해행위에 불과했다.


역설적으로 ‘거짓’을 말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알아야 한다. 거짓이 존재해야 진실도 존재할 수 있다. 과학 또한 거짓에서 진실을 건져내는 학문이다. 가설이라는 수많은 거짓에서 끝없는 실험과 논증을 거쳐 검증이라는 진실로 나아간다. 가설이 틀렸을지언정 언젠가 해답을 향해 나아가는 게 과학적 사고이자 발전 가능성이다. 거짓과 진실은 서로를 지탱한다. 거짓을 모른다는 삼체인들은 거짓없는 진실의 탑이 결국 한계가 있음을 스스로도 깨닫고 있다.


삼체인들은 성간 운행이 가능한 우주함대를 구축하고, 양자역학에 통달할 만큼 엄청난 문명을 이루었다. 인류가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과학적 성취를 이룩했지만 그들의 걱정거리는 400년 후 놀라운 속도로 발전할 인류의 문명이 침공을 막아내는 것이다. 삼체인의 전술은 총과 칼을 앞세운 물리적 타격도 아니고 심리전을 동반한 정신적 테러일 필요가 없다. 기초학문을 파괴해 과학적 사고와 발전 가능성을 말살하는 또 다른 이름의 문화혁명이 그들의 무기다.


■ 인간에게 가장 어울리는 문제


<삼체>는 외계인과의 낭만적인 첫 만남을 다룬 스티븐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 우호적 교류를 바탕으로 한 인간적 성장 드라마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와는 다르다. 백악관을 레이저로 박살 내는 <인디펜던스 데이>, 손가락으로 우주 생명체의 반을 멸망시키는 빌런의 <어벤져스>와도 노선이 다르다. 인류의 멸망을 앞두고 있지만 <돈 룩 업>처럼 냉소적이지 않고 <멜랑콜리아>같이 염세로 물들지도 않았다. <삼체>가 기존 작품들과 결을 달리하는 건 작가의 국적 때문도 아니라 해답이 없는 삼체문제를 선택한 덕분이다.


우리는 2차원이 아닌 3차원에 살고 있다. 나와 외부 사이에 끼어든 어떤 문제든 자체의 중력으로 삶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푸앵카레가 증명했든 삼체문제의 해답은 정말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찾을 수 없다. <삼체>는 존재하지 않는 답의 근사치까지 도달하기 위해 분투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드러내기로 작정했다. 인류가 마주한 문제 대부분도 그렇다. 기후 위기, 부의 양극화, 차별화 혐오 등등. 완벽하게 해결된 문제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윌은 췌장암 4기로 시한부를 선고받는다. 루비에게 물려받은 1,900만 파운드의 유산은 진을 위한 별을 사는 데 모두 사용하고 두뇌를 냉동시켜 우주선에 태운 뒤 핵폭탄 100개를 터트려 빛의 1%의 속도로 삼체인을 만나는 위험한 계단 프로젝트에 자원한다. 하지만 프로젝트는 실패로 돌아가고 윌은 영원히 우주를 떠돌게 된다. 그렇다고 윌의 결정이 무의미한가. 초속 70km까지 가속한 윌은 인류의 인류가 지금까지 만들어낸 어떤 것보다 빠른 속도로 비행하는 물체로 기록됐다. 지금은 틀린 답이지만 맞는 답을 향한 근사치가 된 것이다.


<삼체>의 오프닝에서 예원제의 아버지이자 물리학자인 예원타이는 인민 재판에서 빅뱅 이전은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고 말한다. 신의 존재를 긍정하냐는 물음에 아무것도 답하지 않은 그는 홍위병에게 맞아 죽는다. 사울은 삼체인의 양자 때문에 입자가속기의 모든 데이터가 오류를 출력하는 와중에도 신을 믿냐는 베라 예 박사의 물음에 ‘세상의 모든 물리법칙을 거스르긴 해도 그게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대답한다.


3차원의 우주에서 인간은 신의 영역이 아닌 인간의 영역을 개척한다. 나와 우주 사이에 문제들은 각자 다른 중력을 지녔다. 너무 빠르거나 조금 늦거나 너무 가깝거나 지나치게 멀거나 잠시 틀릴 수는 있지만 시작점도 종점도 알 수 없는 그곳은 온전히 인간의 영역이다. 삼체문제의 해답인 근사치는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가장 어울리는 해답이자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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