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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한 Jun 11. 2024

<원더랜드> 김태용월드가 공유하는 기적의 성장법

WONDERLAND, 2024

정확한 답이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성인영화와 성장영화의 차이는 무엇일까. 민규동 감독과 함께 데뷔작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만들던 김태용 감독은 자의적으로 이렇게 구분했다고 한다. 과거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면 성인영화, 미래에 대한 불안을 보인다면 성장영화. <원더랜드>는 사망 혹은 그에 준하는 인물을 ‘원더랜드’라는 가상공간에 복원하는 일을 다룬다. 죽은 인물에 대한 그리움을 소재로 본다면 성인영화지만 그로 인한 불안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성장영화이기도 하다.


소재는 성인, 메시지는 성장 영화라는 ‘부조화’는 <원더랜드>를 지탱하는 뼈대다. 모든 것이 조화롭게 존재한다면 영화, 나아가 이야기라는 게 시작될 수 없겠지만 <원더랜드>의 주인공들은 특히 극심한 부조화에 놓여있다. 바이리(탕웨이)는 딸에게 죽음을 숨기기 위해 원더랜드 서비스를 신청한다. 딸이 서비스에 몰입할수록 바이리의 엄마, 즉 딸아이의 할머니는 괴로움에 빠진다. 정인(수지)은 사고로 코마 상태에 있는 태주(박보검)가 깨어나길 원하지만, 막상 태주가 깨어나자 낯설기만 한 그의 모습 때문에 원더랜드의 태주를 더 그리워하게 된다.


SF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망자에 대한 그리움, 상실의 아픔을 겪는 인간은 친숙하다. 원더랜드 같은 서비스가 상용화 된 근미래에도 인간의 고민은 보편적이다. <원더랜드>는 이런 보편적 고민에서 한발 더 나아가는데 ‘원더랜드’ 속 등장인물들이 현실보다 더 이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럴 것이 원더랜드 속 인물은 본인과 가족의 선택에 따라 만든 가상현실이기 때문이다. 가상현실에서도 구질구질한 나를 가져갈 이유는 없다. 티끌 하나 없는 액정화면처럼 현실의 구김을 찾아볼 수 없는 매끈한 인물이 살아가는 세계가 펼쳐진다.


■ 세계가 가짜가 되는 순간, 1초


 <원더랜드>는 탕웨이, 수지, 박보검, 정유미, 최우식, 공유라는 화려한 출연진으로 화제가 됐다.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배우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중성을 갖춘 CF 스타들이기도 하다. 흠잡을 데 없는 선남선녀인 이들은 원더랜드라는 서비스의 광고모델처럼 행동한다. 로맨틱코미디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아파트 광고에서나 볼 수 있는 걱정거리 하나 없는 가족 같기도 하다. 상실의 고통 없이 현재의 충만함으로 채색된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김태용 감독의 영화가 맞는지 당황스러울 정도로 과시하듯 초반부를 장식한다.


가상현실의 바이리는 자신의 어린 시절 꿈이자, 딸의 장래 희망인 고고학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생전 그녀는 바쁜 펀드매니저 생활 때문에 딸과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 많았다. 미안함을 속죄라도 하듯이 바이리는 끊임없이 딸과 연락하고 소통하는 모습을 보인다. 원더랜드 속 태주는 정인의 출근 루틴을 꿰고, 감미로운 노래를 불러주고, 약병이 어느 서랍에 들었는지까지 안다. 침대에 누워있던 순간은 당연하고, 뇌 손상으로 감정과 감각이 불안정한 현실의 태주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든든한 존재다.


그러나 가상의 삶이 현실보다 낫다면 굳이 현실이 필요할까. 바이리의 엄마는 고통스럽다. 바이리가 손녀에게 미치는 영향은 점점 커지고, 가상현실이 점차 현실을 대체하는 상황이 되자 ‘너는 내 딸이 아니야’라고 소리를 지르며 서비스를 해지한 뒤 손녀와 함께 중국으로 떠나려 한다. 혼란스러운 건 정인도 마찬가지다.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태주에게 급기야 가짜 태주를 보여주며 이별을 고한다. 사랑하는 이의 온기, 적당한 무게감, 살갗의 촉감을 느낄 수 없는 상실감은 완벽한 이상향이 구현된 세계가 가짜가 되는 건 한순간이다. 1초도 안 걸린다.


이동진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김태용 감독은 뇌에서 진행되는 망각의 조건을 이렇게 설명했다.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사건으로, 비의지적 사건을 의지적 사건으로 이루어진다고. 김 감독이 해석한 의지적 사건이란 말이 아닌 몸의 언어로 과거를 이겨낸다는 의미다. 현실에서 과거를 추모하고 상실을 버텨내는 것도 비슷한 방식이다. 억지로 몸을 움직여 밥을 짓고, 집안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햇볕 아래 빨래를 널고, 가벼운 산책을 나가는 일. 상실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억지로 몸을 움직이는 치유 과정에 공감할 확률이 높다.


<원더랜드>의 치유 역시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정인은 태주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연을 날렸던 공원을 찾는다. 이별을 받아들인 태주가 공원을 떠나자 애타게 달려가 그를 뒤에서 끌어안는다. 정인은 깨달았을지 모른다. 원더랜드 속 다정다감한 우주비행사 태주는 과거의 사건일 뿐이고 현재의 사건을 만들 수 있는 태주는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 나가는 태주뿐이라고. 뇌 손상으로 감정을 둔해졌던 태주는 정인의 포옹에 마침내 눈물을 흘린다. 태주의 복귀라는 새로운 사건은 둘을 힘들게 했지만, 과거의 사건은 이렇게 또 현재에 덧입혀 흘러가게 될 것이다.


치유는 몸으로도 이루어진다. 얼굴을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원더랜드 서비스의 기본이다. 몸보다는 비의지적인 언어로 이루어지는 소통이다. 하지만 바이리의 딸이 공항에서 실종되자 바이리는 몸을 움직인다. 자신이 원했던 고고학자의 삶을 뒤로 한 채 딸을 찾기 위해 사막의 모래폭풍을 뚫어낸다. 그녀의 의지에 현실 세계도 반응한다. 해리와 현수는 데이터 삭제 대신 공용 네트워크를 열어 그녀의 메시지가 타인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돕는다. 타인이 겪어내는 상실의 몸부림에 연민을 담아 손을 내미는 것처럼 말이다.


■ 김태용월드가 공유하는 기적의 성장법


많지 않은 김태용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기시감이 드는 건 역시 <가족의 탄생>이다. 1~2명의 주인공에게 집중하기보다 다양한 등장인물이 등장하고, 각자의 타임라인에서 옴니버스처럼 내용이 전개되다가 끝에서 하나의 이야기로 포개지는 플롯은 <가족의 탄생>과 똑 닮았다. SF를 넘어 현실의 제약을 아득히 뛰어넘는 기적과도 같은 마술적 리얼리즘이 주인공들의 감정을 대신하는 클라이맥스도 <원더랜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같은 대사도 있다. <가족의 탄생>에서 이별 후 공동의 짐을 찾으러 온 류승범이 선경(공효진)에게 “너 왜 이렇게 나한테 막 해”라고 푸념한다. <원더랜드>에서는 기대만큼의 행복을 주지 못하는 태수에게 정인은 “너 왜 이렇게 나한테 막 해”라며 소리친다. 이별이나 상실감으로 외로움을 겪는 이들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왜 이렇게 마음을 몰라주냐’는 서운함이란 태풍이 되어 가족이나 애인처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서로에게 상처 입은 가족들이 2시간 동안 투덕대던 <가족의 탄생>은 어떤 갈등도 극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선경은 그렇게 싫어하던 엄마 매자(김혜옥)를 닮아가는 중이고, 경석(봉태규)을 속터지게 만드는 채현(정유미)의 헤픔도 바뀌지 않을 거다. 다만 형철(엄태웅) 없이도 잘 지내는 미라(문소리)와 무신(고두심)처럼 노력과 의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을 지킬 뿐이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없지만,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은 바꿀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것처럼 하다가 능구렁이처럼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던 기술이 이제는 가상공간과 현실까지 다루며 스케일을 키웠다. 이렇게 복잡해진 세상에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영화가 치유에 복무해야 한다는 의지를 가진 김태용 감독이 제시하고 부인인 탕웨이의 입을 통해 말해지는 해답은 간단하다. “잘 먹고 잘 자고 운동 열심히 하고”.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똑똑해지는 인공지능 시대에도 사람이 해야 할 일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별거 아닌 일들로 기적(Wonder) 같은 성인의 성장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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