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clave, 2025
에드워드 버거 감독의 <콘클라베(Conclave)>에서 중요하게 봐야 하는 부분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인 교황을 선출한다는 것도 있지만, ‘열쇠로 걸어 잠글 수 있는 방’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어원 ‘쿰 클라비(Cum Clavis)’이다. 선출이라고 하지만 열쇠로 걸어 잠근다는 의미에서 보듯 가톨릭 신자들이 전부 참여하는 것도 아니고 전 세계의 추기경(나이 제한도 있음)이 모여 투표를 진행한다. 아마 비율로 본다면 지구상에서 가장 폐쇄적인 투표일 것이다.
영화 <콘클라베>에서도 그런 부분들이 드러난다. 콘클라베 기간 외부와 접촉을 차단하기 위해 추기경들의 휴대전화는 당연히 압수되고, 창문의 떨림을 통한 도청까지 막기 위해 보안 전문가들이 투입된다. 이러한 폐쇄성은 물리적 환경에서 그치지 않는다. 언어, 인종, 대륙별로 이미 파벌이 형성되어 있어서 새로운 사람은 함부로 끼어들 수가 없다. 전임 교황이 생전에 의중결정 추기경으로 임명한 탓에 존재를 누구도 존재를 몰랐던 베니테즈(카를로스 디에즈)가 식당에서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로렌스(레이프 파인즈)와 식사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추기경들이 묵는 숙소인 ‘성 마르타의 집’ 구조는 콘클라베의 폐쇄성에 방점을 찍는다. 투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수를 차단하도록 봉인한다는 명분이지만 성 마르타의 집에서는 심지어 선종한 전대 교황의 방도 굳게 잠긴다. 별다른 장식도 없는 네모반듯한 단체숙소에서 추기경들은 1인 1실을 사용하며 모두 각자의 카드키를 갖고 있다. 자물쇠가 걸리는 둔탁한 효과음이 텅 빈 복도를 채우며 문이 잠기는 장면 또한 여러 차례 반복되고 문 열고 방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자주 보이지만, 추기경이 문을 열고 나오는 장면은 연출되지 않는다.
우스운 사실은 이렇게 강도 높게 유지하는 폐쇄성의 기능이 사실상 상실된 상태라는 점이다. 당장 로렌스 만 하더라도 운신이 자유로운 보좌사제를 통해 외부의 소식을 접하고 있으며, 봉랍해 놓은 교황의 침실에 몰래 침입한다. 숙소 또한 방음이 좋지 않아서 외부의 소음이 자연스럽게 방으로 흘러들어온다. 계단에서 비밀리에 회동이 열리기는 하지만 위아래가 연결된 구조로 인해 마음만 먹는다면 타인의 대화를 엿듣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소문은 하루도 안 되어 추기경들 전체로 퍼지고, 반나절 사이에 유력한 교황 후보가 고꾸라지는 일이 반복된다.
허울뿐인 폐쇄성으로 명분을 찾기 어려운 전통에 급소를 찌르는 건 추기경이 아닌 수녀들이다. 콘클라베 기간 추기경들의 식사를 비롯한 합숙 생활 일체를 책임지는 수녀들이지만, 이들은 투명 인간 취급을 당한다. 당연히 투표에도 참여할 수 없다. 성당의 창문이 가림막으로 가려지고, 추기경들의 휴대전화가 압수되지만 수녀회의 사무실에는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컴퓨터가 문제없이 동작하고 있다. 배경처럼 소비되던 수녀들을 대표하는 아그네스는 중요한 증언을 하기 전에 이렇게 선언한다. “수녀는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있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저희에게 눈과 귀를 주셨다”라고.
그렇다면 <콘클라베>는 왜 이렇게 폐쇄성에 집중할까. 수십 년을 종교에 몸담은 최고위 성직자도 쉽게 흔들리고 실수 많은 인간임을 제도와 전통, 즉 폐쇄성을 통해 조금이라도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유력 후보들이 낙마하는 이유는 놀랍게도 놀랍지 않다. 성직자들의 성추문,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성직 매매는 내부의 권력투쟁에서는 요긴하게 사용될 수 있는 아이템일지 모르나, 이제 어지간한 규모의 스캔들이 아니고서는 대중들에게 관심을 받지 못할 뉴스다.
그럼 감독은 온전히 가톨릭을 포함한 종교계의 위선을 조롱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을까. 절차를 다시 살펴보면 교황은 어떤 계시로 점지되는 게 아니라 투표를 통해 선출된다. 교황이 하나님의 대리자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이며 간음한 여인에게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에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는 것처럼 죄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니 죄 많은 인간 사이의 절차를 알리는 과정이 바로 콘클라베의 핵심이다.
문을 닫는다는 것은 곧 여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다. 콘클라베의 폐쇄성을 강조한 영화는 로렌스라는 인물에게 닫힌 문을 여는 열쇠를 건넨다. 로렌스는 추기경단 단장으로 콘클라베를 관리하며 무사히 교황을 선출해야 할 임무를 맡지만, 그를 이루는 핵심은 ‘의심’이다. 기도가 어렵다며 본인의 신앙을 의심하고, 의식을 주관하는 처지에서 추기경들의 자격을 의심한다. 로렌스가 의심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의심 없이 폐쇄성을 극복할 수 없는 탓이다. 내부의 논리, 형식, 가치관이 옳다고 믿는 조직은 외부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교류할 까닭이 없다.
유력한 교황 후보 테데스코(세르히오 카스텔리오) 추기경은 진보파에 속하는 로렌스와 반대 관점이다. 강경한 전통주의로 무장한 그는 로마와 로마의 전통 없이는 중심을 잃어 분열될 수 있으며, 40년간 나오지 않은 이탈리아인이 교황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테데스코에 반대하는 추기경들이 각자의 사유로 지지를 잃자, 로렌스는 교회를 과거로 되돌릴 수 없다는 신념 아래에 본인의 이름을 적어 투표함에 넣는다. 의심을 멈춘 그가 의심하는 교황이 선출되게 해달라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기라도 하듯 시스티나 성당이 이슬람 세력의 폭탄 테러로 공격을 받는다.
아이러니하게도 파괴된 성당의 지붕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와 폐쇄되었던 콘클라베에 새로운 공기를 불어 넣는다. 추기경들은 투표용지를 살랑거리는 산들바람을 느끼고 다시 투표를 진행하고 결국 새로운 교황이 탄생한다. 기도를 할 수 없다는 로렌스 역시 교황 후보의 첫 번째 조건이자 인류가 생기면서부터 시작됐을 오래된 고정관념 혹은 편견에 의심하는 마음을 갖게 되며 흔들리던 신앙을 되찾는다. 마지막까지 의심을 지켜나갈 수 있기에 신비와 손잡고 믿음을 지켜갈 수 있었다.
콘클라베가 끝나고 마침내 닫힌 문이 열린다. 처음으로 평온한 표정을 보이는 로렌스는 차분하게 짐을 정리하며 창밖을 본다. 교회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없는 사람 취급을 받던 수녀들이었다. 열쇠의 소명은 닫힌 문을 여는 것. 문을 열고 새로운 세상에 나아가는 건 새로운 세대다. 굳게 닫혀있던 성당 안에서는 들을 수 없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새로운 교황의 탄생을 축하하는 대중들의 환호가 들린다.
로렌스의 풀네임은 토마스 로렌스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의 열두제자 중 도마로 불리는 이가 바로 토마스(Thomas)다. 도마는 의심의 사제였다. 부활한 예수를 믿지 않다가 결국 손과 옆구리에 난 구멍을 보고서야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Dominus meus et Deus meus)”이라며 믿음을 되살렸다. 예수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을 남겼지만, 불신이 아닌 맹신이 문제가 되는 시대다. 콘클라베를 앞둔 토마스의 기도를 듣고 예수님도 생각을 바꾸지 않겠느냐는 의심을 남긴다.
“제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죄는 바로 확신입니다. 확신은 통합의 가장 큰 적입니다. 확신은 관용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조차 마지막 순간에는 확신하지 못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십자가에서 9시간을 매달리신 후 고통 속에서 그렇게 외치셨죠.
우리의 신앙이 살아 있는 것은 의심과 함께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오직 확신만 있고 의심이 없다면, 신비도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믿음도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의심하는 교황을 보내주십사 주님께 기도합시다.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하고 실천하는 교황을 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