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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딸> 실패하지 않는 가족영화의 조건을 증명하다

My Daughter is a Zombie, 2025

by 고요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지간한 러닝 크루보다 풀코스 기록이 좋을 거 같고, 박쥐 수준의 청력과 온도 파악 능력, 심지어 감정이 있는 좀비까지 등장했지만 ‘살아있는 시체’ 좀비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은 아직 유효하다. 바이러스를 은폐하려는 국가나 초거대기업의 무책임과 비윤리성, 인지능력을 상실한 무비판적 군중으로서의 표상, 생존을 위해 이기적 본성을 주저 없이 드러내며 타인의 희생도 주저하지 않는 군상들과의 대립 등. 좀비를 둘러싼 담론은 호러 장르에 깊이를 더하는 요소였다. 필감성 감독의 <좀비딸>에는 해당 없지만.


서울에서 원인 모를 이유로 좀비 떼가 창궐한다. 전국 댄스 경연대회를 준비하던 중학생 수아(최유리). 싱글대디 정환(조정석)은 아수라장이 된 서울에서 벗어나 딸과 함께 조용한 고향마을 은봉리로 도망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수아가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좀비에 대한 무차별적인 사살을 명령하고, 좀비를 발견하고 신고하지 않거나 숨겨주는 경우 법적 처벌을 하겠다는 방침을 공표한다.


다행히 수아는 동물조련사인 정환의 극진한 훈련으로 공격성이 많이 약화된다. 사람을 물어뜯는 대신 곱창으로 요기하고, 할머니 밤순(이정은)의 정성 어린 보살핌, 동시에 효자손을 앞세운 훈육 속에 샤워도 하며 청결을 유지하는 좀비 생활을 이어간다. 회색톤의 피부와 불거진 핏줄은 시골에서도 살 수 있는 로드샵 화장품으로 적당히 가리고, 뇌를 다쳐서 말과 행동이 둔하다는 설정이면 등교도 가능하다. 이런 ‘모범 좀비’를 보며 우리에게 더 익숙한 병명이나 증상이 있다면 아마 ‘코로나’일 것이다.


2018년에 시작해 2020년에 완결된 원작 웹툰이 어떻게 영화로 각색되었고, 그 과정에서 지나야 했던 코로나 시대가 얼마만큼의 영향을 주었는지는 어림할 수 없다. 다만 감염자에 대한 일부 대중의 과한 공포와 강렬한 반감, 세계적 비상사태를 맞아 인원과 영업시간에 제한까지 두었던 정부의 강력한 대처, 증상 발현 시 지켜야 했던 까다로운 격리 수칙 등을 2년간 겪은 관객들이 <좀비딸>을 포스트 코로나 영화로 소비하고 해석하는 상황까지 피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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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비사회학을 대체하는 새로운 담론


<좀비딸>에서 옅어진 좀비의 존재감을 대체하는 건 또 다른 담론들이다. ‘기억이 있다면 사람’이라는 정환의 절규는 치매라고 불리는 인지증에 관한 이야기이며 거동이 자유롭지 않은 가족을 보살펴야 하는 돌봄노동의 일면 같다. 더 비약하자면 이해할 수 없는 사춘기 자녀의 행동으로 상심하는 부모의 모습에서 세대 갈등 요소도 찾아낼 수 있다. 좀비가 전면에 등장하지만, 일반적 좀비 영화의 주제들을 피해 간 덕분에 오히려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조망하게 됐다고 할까.


두드러지는 건 ‘가족’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다. <부산행>을 비롯해 <해운대>, <국제시장>까지 불가항력적인 시대의 폭력과 재난 앞에선 가족을 지키는 힘은 혈연을 바탕으로 한 부성/모성애였다. 알면서도 당하는 최루성 눈물에는 ‘신파’라는 평이 자연스레 따라왔다. <좀비딸> 역시 예상하던 대로의 전개가 펼쳐진다. 조건반사처럼 흐르는 눈물을 참기는 힘들다는 말이다. 다만 ‘신파’라고 불리는 감정까지 도달하는 경로가 앞선 작품들과는 조금 다르다.


극 후반에서 밝혀지듯 정환과 수아는 직계혈족이 아니다. 정확히는 삼촌과 조카 사이다. 친하다면 친할 수 있지만 부양의무를 다하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할 수 없는 정도의 관계. 여기에 정환의 고향 친구들이 합세해 수아를 돕는다. 까다로운 법적 조건을 본다면 유사 가족 혹은 시민결합이라 말할 수 있는 느슨한 관계에도 다수의 관객은 ‘신파’라는 격한 감정의 후기를 털어놓는다. 혈연주의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한국 사회를 고려할 때 어쩌면 서울 시내의 좀비 창궐보다 더 비현실적인 감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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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에서 정환은 (유사)가족이냐 공공선이냐를 두고 각기 다른 방향에서 한 차례씩 극단적인 선택을 종용받는다. 사람에 따라 이성적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일 수 있겠으나 관객의 감정선은 대체로 일정하게 유지된다. 국가비상사태에서 일탈하는 정환이 절대 선인도 아니고, 극 전체를 장악하는 악인에 맞서는 뚜렷한 선악 구도를 내세운 작품도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코로나를 겪으며 개인과 공공선 사이의 딜레마를 체화한 덕분일 수도 있지만, 확대된 가족상이 한국 사회에도 정서적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는 긍정적 신호로 받아들일 여지도 충분하다.


일주일 간격을 두고 개봉한 <판타스틱4>는 <좀비딸>과 같은 딜레마를 공유한다. 차이라면 <판타스틱4>의 주인공은 평범한 소시민이 아니라 전 세계의 군대를 해체시킬 정도의 영웅이며, 대중의 시선을 피해 외진 곳으로 숨어드는 게 아니라 넓은 광장에서 가족과 지구 모두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딜레마를 돌파한다. 이 영웅들의 숭고한 선언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함께 정서적 클라이맥스로 설계됐지만 어쩐지 깊은 울림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판타스틱4>만의 문제일까. 공교롭게도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개봉 시점은 코로나 직전이었다. 제임스 캐머런이 <아타바>, <타이타닉>으로 갖고 있던 역대 최고의 흥행을 뛰어넘은 후 확장된 MCU 세계관과 함께 승승장구할 거 같았지만 히어로 장르의 부진은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다. 이에 대해 다양한 분석이 있겠지만 어쩌면 한 명, 소수의 영웅이 어쩔 수 없는 전염병 탓에 슈퍼히어로에 대한 기대가 전 지구 단위로 급격히 줄어든 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더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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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한 그를 욕하진 말아줘 니 얼굴도 조금씩 변하니까


전국 중학생 댄스 경연대회를 준비하는 수아의 선곡이자, 정환과 함께 안무를 연습하던 추억이 담긴 곡으로 보아의 ‘No.1’이 등장한다. 인터뷰에 따르면 작품 외적으로는 감독이 좋아하는 곡이라고 한다. 2002년 월드컵 시즌 거리에서 울려 퍼지던 걸 기억한다면 충분히 설득력 있는 선곡이다. 작품 내에서 수차례 등장하는 연구에 따르면 인간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다양한 활동들이 대뇌피질을 자극해 공격성을 낮추고 회복 가능성을 높인다고 한다.


소품으로 쓰일 것 같던 곡은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영화 내에서 쓰이고 결정적 순간에도 재생되며 관객들에게 잊히지 않는 정서적 흔적을 남긴다. ‘You still my No. 1’이 반복되는 후렴은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정환, 상실의 고통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밤순. 그리고 겉모습은 좀비로 변했지만, 깊은 곳에는 인간성을 간직했으리라 믿고 싶은 수아의 변하지 않는 마음을 표현하는데 더없이 적합한 선곡으로 보인다.


문학교과서에 수록되어 해석이 덧붙여진 것처럼 ‘No.1’은 달을 모티브로 만든 가사를 썼다. 영화에서는 제대로 등장하지 않지만 <좀비딸>의 주제 의식을 담은 구절은 어쩌면 다음이 아닐까. 보름에 걸쳐 겉모습을 바꾸지만, 소리 없이 따라와 구름 뒤에서 못다 한 사랑을 전하는 달빛. 해가 진 밤에 모습을 드러내는 달이 모두의 어둠을 밝히는 No.1이듯.


변한 그를 욕하진 말아줘 니 얼굴도 조금씩 변하니까

But I miss you 널 잊을 수 있을까

(Want you back in my life, I want you back in my life)

나의 사랑도 지난 추억도 모두 다 사라져 가지만


태양으로부터 직사로 내리쬐는 햇빛이 아니라, 그런 햇빛을 한 차례 반사해야만 하는 달빛은 어쩐지 핏줄로 엮인 직계혈통과는 다른 유사가족과 닮아있다.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의지와 노력으로 결합하고 말이 아닌 행동을 통해 보여주는 조건 없는 사랑. 이 단순한 진리를 놓치지 않는 가족영화는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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