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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주인> 불편함을 구조화하는 독창적 작법

The World of Love, 2025

by 고요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몇 개의 이름이 있다. 영화 보는 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무엇 때문에 돈 내고 불편한 걸 보러 가느냐는 물음표를 띄우는 목록. 예매창을 켤 때부터 각오해야 하는 감독들. 뻗어가거나 수렴하거나 튕겨 오르거나 납작해지거나. 경험했거나, 지켜봤거나, 상상했거나, 생각도 못 한 세계를 자신 있게 펼쳐내는 창작자. 윤가은 감독은 <우리들>, <우리집> 그리고 <세계의 주인>으로 그 명단에 또렷하게 이름을 새겼다.


기꺼이 감수하고 싶은 불편함. <세계의 주인>은 이런 기대를 외면하지 않는다. 암전된 화면과 함께 들리는 낯선 효과음. 화면이 밝아지면 교복 입은 학생들이 진하게 키스하고 있다. 다소 놀라운 오프닝은 이제 그만 보여줘도 되지 않을까 싶은 순간까지 밀고 간다. 화면이 바뀌면 관객의 불편함을 대변하듯 주인(서수빈)의 단짝 유라(강채윤)는 ‘연애 좀 살살 해라’라고 구박한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는 유라는 학교에서 19금 만화를 그리고 있다. 이어 성과 사랑이 궁금한 여고생들의 적나라한 대화가 펼쳐진다.


체육 시간에 선생님보다 더 설치며 운동장을 누비고, 남학생에게 헤드락 거는 것도 거리낌 없는 주인의 좌충우돌 연애담인가 싶은 오해는 곧 풀린다. 성실한 모범생 수호(김정식)는 전교생을 대상으로 서명을 받으러 다닌다. 아동 성폭행범이 출소하지 않게 해달라는 내용이다. 주인은 졸리다거나 괜한 핑계를 들다가 ‘성폭행이 피해자의 삶을 망가뜨린다’라는 문장이 맘에 안 든다고 한다. 그 문장이 뭐가 문제냐며 따지는 수호. 오가는 말 속에서 갈등은 커지고 마침내 주인은 “나도 성폭행 피해자다” 소리치며 윤가은식 불편함의 화약고에 불을 댕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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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편함을 구조화하는 윤가은의 독창적 작법


윤가은 스타일이라고 칭한 이유는 불편함을 구조화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많은 리뷰와 후기에서도 언급됐듯 <세계의 주인>에서 주인이 겪은 사건은 친족 성폭행이란 단서만 흐르듯 제시되고 자세한 묘사는 생략됐다. 당연히 사건에 대한 표현도 없고, 플래시백 같은 장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삶을 흔들 격변의 여진만이 남아 꾸준히 현재 시점의 주인의 세계를 채워간다. 놀라기는 하지만 에너지 넘치는 K-장녀 같은 주인의 현재 모습에서 찾아볼 수 없던 그늘이 있고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놀라움이지 경악이나 충격과는 다르다.


윤가은의 독창적인 불편함이 여기서부터 작동한다. 관객은 주인이 아닌 세계의 위치. 즉 주변인의 자리에 배치된다. 진담인지 잠시 고민하게 되는 급작스러운 고백은 주인이라는 주인공을 조금 알 것 같다는 자만심을 통렬하게 파괴한다. 동시에 아픈 과거가 있던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하고, 어떤 마음으로 남은 시간 바라봐야 할지 결정을 재촉하듯 은근하게 몰아부친다. 상영시간은 아직 1시간이나 남았는데 말이다.


단짝의 과거사를 처음 알고 충격을 받은 유라의 신경 쓰이는 거리두기. 절친 모임의 걱정과 우려와 억측 등이 버무려진 대화. ‘네가 너무 어렵다’라며 이별을 고하는 남자 친구. 정리정돈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들이 쏟아지며 사실상 관객과 동일시된 주인의 세계는 발 디딜 곳을 하나 찾기 힘든 쓰레기 집처럼 무례와 위로, 안타까움과 불편함으로 무질서하게 혼란스럽다. 무슨 입장을, 어떤 말을,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주저되는 이 마음이 윤가은식 불편함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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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외면하고 싶은 이 마음을 하나씩 꺼내어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차곡차곡 제자리에 두려는 창작자의 뭉근한 결기가 작동하는 곳도 주인의 세계다. 같은 피해를 당한 자조 모임은 정기적으로 만나 쓰레기장을 치우는 봉사활동을 하고 맛있는 걸 나눠 먹는다. 주인의 동네 언니이기도 한 미도(고민시)가 피해자 증언을 하러 법원에 출석할 때 방청석에서 함께 해주고, 피고 변호인의 몰상식한 질문으로 고통스러워할 때는 법정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나아가 그녀의 손에 손수건을 쥐여준다.


태권도장 관장님(이대연)은 주인이 언제든 찾아와 샌드백에 발차기할 수 있도록 도장 문을 열어놓는다. 태권도장 한편에는 불에 그을린 화재의 흔적이 있다.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집을 뛰쳐나온 미도가 삼겹살을 굽다가 태워 먹은 벽이다. 도장에 새로 페인트칠을 하지만 관장님은 페인트공에게 그쪽은 그냥 두시라고 말한다. 자신의 결정으로 지울 수 있는 시기가 오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듯.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그려낼 수 없기에 영화의 마지막까지도 우리는 주인의 자리에 설 수 없다. 수호의 어린 여동생 누리(박지윤)는 주인의 엄마 태선(장혜진)이 운영하는 유치원을 다녀온 뒤 목 부분에 멍이 들어 온다. 반복되는 일에 수호는 태선을 찾아가 CCTV를 보여달라고 사정한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누리를 멍들게 한 건 주인이다. 해코지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아파도 소리를 내지 않는 누리에게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주기 위한 어떤 소신과 모종의 결심이 담긴 과격한 오지랖일 뿐. 장래 희망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복잡다단한 소녀의 살아가는 방법에 화면도 화답한다.


윤가은 감독은 인터뷰에서 100명의 피해자에게 100가지 모습이 있어서 오로지 주인에게만 집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100명의 피해자를 둘러싼 세계 역시 100가지의 모습일 것이다. 성폭행 피해자임을 고백한 후부터 두 차례 등장한 발신자 불명의 쪽지가 다시 주인에게 도착한다. 편지 내용이 꾸짖듯 화면을 가득 채웠던 앞선 두 번과 달리 세 번째 쪽지는 목소리로 전달된다. 너의 용기가 자신의 용기가 되었다는 말이 주인을 둘러싼 세계의 목소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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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우마와 세계의 주인


트라우마의 어원은 ‘뚫다’라는 뜻의 그리스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이 트라우마 앞에서 인간은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주체가 아닌 대상이 되어버린 이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지 당사자가 아닌 사람은 짐작하기 어려우며 표현 역시 ‘나는 트라우마를~’이 아니라 ‘트라우마가 나를~’ 이라고 쓸 수밖에 없다는 말을 덧붙인다. 야속하게도 주인에게 남겨진 트라우마는 주인의 세계만 꿰뚫고 지나가지 않는다.


주인의 동생 해인(이재희)은 마술에 심취했다. 해인은 가족들에게 학예회 참석을 신신당부하지만, 각자의 사연으로 아무도 오지 못한다. 오지 않는 가족을 기다리며 해인은 관객들에게 근심과 걱정을 담은 쪽지를 받는다. 그것을 사라지게 만드는 게 오늘 마술쇼의 하이라이트. 수도 없이 연습한 멘트와 동작들을 애써 해내지만 해인의 마술은 실패한다. 관객들의 근심과 걱정은 무대에 뒹군다.


수호와의 다툼으로 학폭위가 열릴 위기가 결국 주인의 서명으로 수습된 뒤 태선은 함께 세차장으로 향한다. 서로에게 미안해하던 모녀의 대화는 왜 아이들만 신경 쓰고 자신을 지켜보지 않았냐는 주인의 절규로 이어진다. 세차 코스의 종료와 주인의 분노도 사그라들고 태선은 별말 없이 담담하게 생수를 건넨다. 어쩌면 가장 가까이서 주인을 보듬어야 할 가족들마저 트라우마의 객체가 되어버린 걸까.


그렇지만은 않다. 해인이 사라지게 하려는 진짜 근심과 걱정은 따로 있다. 교도소에서 집으로 보내오는 작은아버지의 편지다. 이 역시 어설프게 침대 매트리스에 쑤셔 넣은 탓에 물건을 찾으러 들어온 주인에게 발견된다. 작은아버지가 사라지면 좋겠’까지 쓴 해인의 보내지 못한 답장까지. 주인은 웃으며 해인의 방문을 나선다. 먼지가 쌓이면 다시 찾아야 하는 세차장처럼, 주인의 오랜 분노와 고통을 한 번에 쓸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태선처럼 제안할 수는 있다. 한 번 더 돌자고.


<세계의 주인>을 본 최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그 일이 나의 세계가 새로 쓰이는 경험이라고 말한다. 지원단체에서는 피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피해 경험을 본인의 자원 삼아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성폭력 피해자의 회복이라고. 트라우마가 나를, 트라우마가 우리를 꿰뚫을 순 있지만 뚫린 마음에 덧댈 수 있는 보내지 못한 답장, 한 번 더 돌자며 상처를 보듬을 세계에서는 바로 우리가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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