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과 가치의 아노미

좋아하는 아티스트에 대해 써라

by 김이도

과제를 전달받은 첫날 막막함에 휩싸였다. 좋아하는 아티스트? 그런 걸 느껴본 게 언제더라? 문득 ‘좋다 like’는 말이 이역만리 떨어진 행성처럼 낯설어 급히 사전을 찾아보았다. 단어가 마음에서 겉돈다 느껴질 때마다 사전에 기대는 편이다. 최대 다수가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인 상식 선에서의 안전한 합의. 네이버 검색창에 ‘좋다’라는 단어를 치면 세 가지 정의가 나오는데, 그중 첫 번째가 과제에서 말하는 ‘좋아함’과 가장 근접해 보였다.


1 대상의 성질이나 내용 따위가 보통 이상의 수준이어서 만족할 만하다.


여러 번 소리 내어 읽으며 문장을 이해하려 애썼다. ‘보통 이상’의 수준이어서 ‘만족’할 만하다 라... 요즘엔 웬만한 음악들이 다 그럭저럭 괜찮다. 비위가 좋아진 걸까? 그보단 가치판단의 기준이 너무나 다양해졌다. 내 안에 황희정승이 자리 잡았다는 뜻이다. 동시에 생성형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과 다원주의, 이를 뒷받침할 뉴미디어 플랫폼의 부상으로 생산과 유통 자체가 어느 때보다도 쉬워진 시대가 아닌가. 향유할 것이 이토록 차고 넘치는데 나는 무엇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그 기준은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가.


2024년 5월 21일 자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하루에 십이만 곡, 한국에서만 만곡이 발매가 되는 시대란다. 어떤 종류의 욕망이던 이를 달성키 위한 인간종의 열의에 경의를 표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런 걸 과연 문명의 발전이라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미 기술 봉건주의가 만개한 시대에 도구의 발달 자체를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너무 빠른 발전 속도로 인한 문화지체현상이 사회에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점점 비가시적인 가치나 보상이 따르는데 시간이 걸리는 가치를 추구하기가 어렵게 느껴진다. 모든 게 너무 빨리 변해 불안하기 때문이다. 일개 사회 구성원인 나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감각과 가치의 아노미를 겪고 있다. 지금 내게 좋아한다는 감정이란 성냥불처럼 휙 붙었다 끝나는 즉시 연기처럼 사라지는 상태다. 이런 상태가 꼭 나쁘지만은 않다. 신기하게도 마음과 정서는 여느 때보다도 안정되어 있다. 그래도 가끔은 좋고 싫음이 너무나도 깊고 분명했던 내가 그립다. 그마마마ᅳ안큼 좋다는 감정이 가져다주는 여러 종류의 쾌와 이를 쫓고자 하는 마음이 원동력이 되어 피워내는 한여름철 무성한 초록빛 같은 생기가 말이다. 좋았던 순간을 꼬옥 붙잡고자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왜 그리 좋았는지 꼭꼭 눌러쓰던, 다시 들을 수 없다면 아예 몸에 새겨버리겠다며 그 순간의 느낌을 되살리려 끝없이 흥얼거리던, 애착愛着하던 나는 어디로 갔을까? 이 레포트를 쓰기 전 나를 이 수업까지 이끌었던 여러 아티스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보고, 그들의 소리를 다시 들어보고 무언가를 쓰려다 이내 쓰지 못하고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젠 열렬히 사랑했던 아티스트들의 소리조차 감히 고만고만하게 느껴진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균질하게만 느껴진다. 내 감각이 매끈해진 걸까? 이제는 언제든 어디서든 원하는 것을 너무나도 쉽게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혹여나 그것에 닿지 못한다 하더라도 대체할만한 것들이 사방에 넘쳐나므로 상관없(다고 착각한)다. 접근성이 낮아진 자리에 기술을 등에 업은 전지전능(하다고 착각)함이 자리 잡자 너무 많은 것들의 가치가 균질해졌다. 그토록 소중했던 음악 또한 마찬가지로.


소리를 다시 소중하게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소리가 다시 소중해지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동시에 또 하나의 질문이 있다. 그냥 모든 것들을 적당히 소중히 여기며 살아갈 순 없을까? 착着하지 않고 살아가면 안 되나. 애착과 좋음의 감각이 내 안에 분리되기 시작해서다. 이번에 겪어보니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하며 살아가는 이 산뜻한 좋음의 상태도 꽤 괜찮다. 깊은 소중함은 가족과 연인과 마음 맞는 친구들이면 족하다. 이게 요즘의 내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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