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나서 스키 벗고 엉덩이로 미끄럼 타며 내려왔는데

절벽 같던 슬로프가 '할 만하네'로 바뀌기까지


나의 장래희망은 스키 타는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누가 물으면 진지하게 그렇게 대답한다. 47살에 처음으로 스키를 제대로 배웠으니, 이제 30년쯤 타면 77살. 그때쯤이면 슬로프를 내려오는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 있을 것이다. 멋지지 않은가.


처음 스키를 배우던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초심자용 그린 슬로프조차 겨우겨우 구르고 미끄러지면서 후덜덜 내려오던 때였다. 스키를 신고 서 있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렸고, 조금만 경사가 급해져도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더 못 타게 됐다. 그야말로 사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내가 가려던 초급 그린 슬로프 가는 길을 완전히 놓쳐버렸다. 정신없이 내려오다가 분기점을 지나쳤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내가 내려갈 수 있는 길은 중급자 블루 슬로프 아니면 상급자 블랙 코스밖에 없었다. 리프트를 타고 다시 올라갈 수도 없는, 완벽하게 갇혀버린 상황이었다.


슬로프가 시작되는 언덕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봤을 때의 그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가파르지도 않았을 텐데, 그때는 정말로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발밑으로 펼쳐진 하얀 경사면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만 같았고, 저 아래까지 어떻게 내려가야 할지 막막했다.


바람은 얼굴을 사정없이 때렸다. 얼어붙은 공기가 코와 입으로 들어와 목구멍을 따갑게 했다. 눈가에 맺힌 게 눈물인지 추위 때문에 나온 콧물인지 분간이 안 됐다. 고글 안쪽으로 김이 서려서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온몸이 떨렸다. 추워서인지 무서워서인지,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도무지 이걸 내 실력으로 스키 타고 내려갈 엄두가 안 났다. 몇 번을 시도해 보려다가 포기했다.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른 스키어들이 쌩쌩 지나가는 걸 보면서, 나는 점점 더 초라해지고 한심해지는 기분이었다.

결국 나는 결단을 내렸다. 스키를 벗었다. 무거운 스키 두 짝을 어깨에 메고, 아까 길을 잘못 든 그 분기점까지 걸어 올라가기로 한 것이다.


그 길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스키 부츠는 걷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진 게 아니라서, 한 걸음 한 걸음이 고역이었다. 발목은 뻣뻣하게 고정되어 있고, 신발 밑창은 미끄러워서 눈 위를 걸을 때마다 중심을 잡기 어려웠다. 스키를 어깨에 멘 채로 걸으려니 무게중심이 이상해서 자꾸만 비틀거렸다.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눈에 발이 푹푹 빠졌다. 정돈된 슬로프를 벗어나니 눈이 깊었다. 무릎까지 빠지기도 했다. 빠진 발을 빼내려고 힘을 주면 다른 발이 또 빠지곤 했다. 옆으로 지나가는 스키어들 때문에 계속 비켜서야 했고, 그럴 때마다 균형을 잃을 뻔했다.


욕이 절로 나왔다. "아 씨발, 진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한숨도 끊이지 않았다. 숨이 차올라서 몇 걸음 걷다가 멈춰 서서 헐떡거렸다. 땀이 나는데 바람이 불면 금세 식어서 등줄기가 차가워졌다.


한참을, 정말 한참을 그렇게 걸었다. 10분이었는지 20분이었는지. 아마 그보다 더 짧았을 수도 있지만 내게는 영겁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분기점에 도착했을 때, 나는 눈 위에 주저앉아서 한동안 헐떡거렸다. 창피했다. 분했다. 억울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 적어도 저 공포의 슬로프로 내려가지는 않아도 되니까.




그러고서 그다음 해 겨울이 왔다. 같은 스키장에 다시 갔다. 그 사이 나는 몇 번 더 스키장에 갔고, 이제는 중급자 블루 슬로프도 쬐금 찍먹해 볼 정도가 되어 있었다. 여전히 능숙하지는 않았지만, 초보 티를 완전히 벗지는 못했지만, 작년보다는 훨씬 나았다.


나는 일부러 그때 그 슬로프를 찾아갔다. 작년에 스키를 벗어 메고 걸어 올라갔던 그 '절벽 같던 공포의 슬로프'를.

다시 같은 지점에 섰다. 1년 만이었다. 이번에는 스키를 신은 채로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여전히 만만하지는 않았다. 경사가 제법 급했고, 아직 내 실력으로는 버거워 보였다. 하지만 작년처럼 절벽 같지는 않았다. 그냥 좀 가파른 슬로프였다.


나는 천천히 출발했다. 크게, 아주 크게 커브를 그리면서 지그재그로 내려갔다. 속도가 붙으면 무서워서 일부러 옆으로 휙 틀면서 속도를 죽였다. 몇 번이고 멈춰 섰다. 숨을 고르고, 다시 출발하고, 또 커브를 그리며 내려가고.

우당탕거리기는 했다. 중간에 한 번은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뒤에서 내려오던 스키어가 "On your left!"라고 외치며 지나갔고, 나는 황급히 비켜섰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팔이 아팠다. 허벅지도 후들거렸다.


그래도 내려갔다. 슬로프를 한 반 정도 어째저째 내려오고 나서 뒤를 돌아봤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작년에 멈춰 서서 도무지 엄두도 못 냈던, 스키를 벗어야만 했던 그 지점을, 이미 반쯤 지나와 있었다는 것을.

묘한 기분이었다. 뿌듯함과 놀라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아, 나 이거 하고 있네. 진짜 하고 있네.'


우리 집 식구들은 이미 한참 전에 먼저 내려갔다. 나보다 훨씬 잘 타는 남편과 아이는 나를 기다리다가 지루해했고, 나는 먼저 내려가라고 했다. 혼자서 중간중간 멈춰 서고 쉬면서, 나는 입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어떻게든 오늘 안에 여기서 내려는 간다. 뭐가 문제냐."

당당하게 말했다. 실제로는 떨고 있었지만. 그래도 말로 하니까 조금 용기가 났다.


그렇게 한번 내려오고 나니, 신기하게도 한 번 더 내려와 보고 싶어졌다. 같은 날 오후에 같은 슬로프를 다시 찾아갔다. 두 번째는 조금 더 수월했다. 어디서 속도를 줄여야 하는지, 어디서 커브를 그려야 하는지 알게 됐으니까. 세 번째는 더 편안해졌다. 할 만했다. 할 수 있었다.




이제 중급자에서 상급자로 넘어갈 참인 요즘도 비슷한 경험을 자주 한다. 새로운 슬로프에 갈 때마다 또 그 순간이 온다. '이거 진짜 되나?' 싶은 순간. '내가 미쳤나, 왜 이런 데를 왔지?' 싶은 순간.


얼마 전에는 울퉁불퉁한 모굴 슬로프에서 진짜 속수무책이었다. 모굴은 슬로프에 작은 언덕들이 계속 이어진 코스인데, 중급자들도 어려워하는 곳이다. 나는 거기서 몇 미터 가다가 넘어지고, 일어나다가 또 넘어지고, 스키가 꼬이고, 완전히 당황했다.


결국 그날은 스키를 벗었다. 그리고 엉덩이로 미끄럼을 탔다. 말 그대로 눈 위에 엉덩이를 대고 쭈욱 미끄러져 내려왔다. 장갑은 눈에 젖었고, 바지도 축축해졌고, 추웠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봤다. 아마 속으로 웃었을 것이다. 나도 내가 우스웠다.


하지만 그다음에 다시 올라갔다. 같은 날은 아니고, 며칠 뒤에. "에이씨, 오늘 안에는 어떻게든 내려가지 뭐" 하고 다시 도전했다. 이번에는 스키를 신은 채로. 천천히, 정말 천천히 내려갔다. 모굴 언덕을 하나씩 넘을 때마다 온 신경을 집중했다. 무릎을 부드럽게 써야 한다는 걸, 리듬을 타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래도 했다. 넘어지고, 일어나고, 또 조금 가고. 그렇게 끝까지 내려왔다.


다 내려왔을 때,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다리는 휘청거렸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웃음이 났다. 해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많은 게 이런 것 같다. 인생의 많은 일들이.

처음에는 겁을 잔뜩 집어먹는다. 울며불며 못한다, 하기 싫다, 무섭다고 한다. 도망가고 싶다. 포기하고 싶다. 왜 내가 이걸 해야 하나 싶다.


하지만 일단 해보면 어떻게든 된다. 완벽하지 않아도, 서툴러도, 우왕좌왕해도, 일단 해보면 된다. 끝까지 가지 못할 것 같아도 어떻게든 도착한다.


그리고 일단 한번 되면 다음에는 더 나아진다. 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 쉽다. 세 번째는 두 번째보다 더 쉽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아 그 정도는 괜찮지" 하면서 심상하게 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작년에 겁먹었던 슬로프를 올해는 워밍업 삼아 탄다. 몇 달 전에 무서워서 피했던 코스를 이제는 재미있다고 다시 찾는다. 예전의 나를 돌아보면 '그때는 왜 그렇게 무서워했을까' 싶다. 그리고 지금의 나를 보면서 '나 제법 늘었네' 싶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엄살 피우고 못하겠다고 울고불고 하는 것도, 스키 벗어서 메고 눈길을 걷는 것도, 엉덩이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도, 아예 시도조차 안 해보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욕하면서 꾸역꾸역 하는 것. 두렵지만 해보는 것. 못할 것 같지만 어떻게든 해내는 것. 나 그거 잘한다. 나 그거 잘하는 사람이다.


스키뿐만이 아니다. 사업도 그랬다. 첫 회사를 시작할 때도 무서웠다. 투자를 받을 때도 떨렸다. 직원을 뽑을 때도, 큰 결정을 내릴 때도, 매번 '이게 맞나' 싶었다. 회사를 정리할 때는 더 무서웠다. 하지만 어떻게든 했다. 울고 욕하면서도 했다.


지금 MePlan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이게 될까?' 싶었다. 템플릿 하나 가지고 비즈니스를 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었다. 마케팅을 해야 하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글을 쓸 때마다 '이게 맞나' 싶었다.


하지만 하다 보니 된다. 완벽하지 않아도, 서툴러도, 시행착오를 겪어도, 하다 보면 조금씩 나아진다. 첫 고객이 생기고, 두 번째 고객이 생기고, 피드백을 받고, 개선하고, 또 시도하고.


가끔은 정말 힘들다. 안 된다 싶을 때가 있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스키장에서 그 슬로프 위에 서 있던 나를 떠올린다. 무서워서 떨고 있던, 하지만 결국 내려왔던 그 순간을.


올해도 그런 한 해가 될 것이다.

욕하고 울고 드러누워서 못하겠다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해보는 한 해. 무섭지만 시도하는 한 해. 넘어지고 일어나고 또 가보는 한 해.


그리고 내년 이맘때쯤, 나는 아마 지금의 나를 돌아보면서 생각할 것이다. '그때는 왜 그렇게 걱정했을까. 다 어떻게든 됐잖아.'




그렇게 1년씩 지나가고, 조금씩 나아지고, 어느새 나는 더 먼 곳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들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두려움은 그때쯤이면 "그 정도는 괜찮지" 하는 일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30년쯤 뒤, 나는 정말로 스키 타는 할머니가 되어 있을 것이다. 백발에 주름진 얼굴로 슬로프를 내려오는. 젊은 사람들이 쌩쌩 지나가는 걸 보면서도 내 페이스대로 천천히 즐기는.


그때쯤이면 이 모든 시간들을, 무서워하면서도 했던 모든 순간들을, 떠올리며 웃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내 장래희망이다. 스키 타는 할머니. 두려워하면서도 계속 도전했던 사람. 넘어지고 일어나고 또 해봤던 사람. 그렇게 살아온 삶을 스키 타듯 내려오는 할머니.


멋지지 않은가.


Photo by Hendrik Morkel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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