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d Love, Find Me.
“누군가 삶에 대해 말해 줬으면 좋겠다. 나는 구원받고 싶다. 힘차게 살고 싶다. 누군가 삶의 이유와 목적을 말해 줬으면 좋겠다. 직업과 부가 삶의 목적일 수는 없다. 모두가 미래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물질적인 미래이다. 다들 좋은 직업을 갖고자 하고, 많은 돈을 벌고자 한다. 이것이 성공적 삶이라고 말한다. 내게는 그렇지 않다. 그런 것들이 내게는 행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거기에서 만족을 찾을 수 없다. 660쪽”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나의 세계가 구성된다. 직관은 기존의 관념을 무너트리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낸다. 부모가 느끼는 자녀의 반항과 엇나감은 여기서 시작된다. 할머니의 죽음을 목격하고서 나는 삶과 죽음에 궁금증이 생겼고 그 해 신학교를 가겠다고 다짐을 했다. 저자가 늘 말하던 무의미하고도 덧없는 세계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기 위한 쓸쓸한 분투였다. 하지만 누구도 그 답에 대해서 말해주지 못했다. 혼란과 절망을 느꼈던 주인공과 같이 나 역시도 같은 감정을 느꼈다.
공황과 우울이 찾아왔다. 삶을 알기 위해 노력한 시간 외에 한 것이 없는데 삶은 나를 괴롭혔다. 억울한 마음에 한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흔적만 남기고 떠나간 저자들과 대화만 나누었다.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빛과 어둠, 시작과 끝. 대극적으로 나누어진 세계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다. 이미 그들도 꽤 오랫동안 이것을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큰 위로를 받았다. 나만 고통스럽고 불안했던 것이 아니구나. 그들도 사랑을 찾기 위해 애썼구나. 불확실함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 분투했구나. 이것이 한계로서의 삶이구나.
그래서 많은 것을 포기했다. 내 뜻대로 흘러갈 세상이 아니라면 필연적인 불안도 도피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졌다. 좋은 삶이란 인과에 있지 않고 그 순간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놀라운 사실이다. 또 아름다운 가치임이 분명하다. 삶은 자주 변덕을 부리고 그 순간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사건으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외출에서 주인공의 삶은 온전히 개인의 분투 속에서 피어난 장미꽃과 같다. 이 장미꽃은 굉장히 예민하면서도 아름답다. 삶을 사랑하기 위해서 죽음을 애정하는 태도를 보이며,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 단점까지 포용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주인공의 모습이 가끔은 냉소적인 사람으로 비치기도 한다. 또 주인공의 삶이 지극히 현실적이라 불편할 때도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의 박탈에서는 우리는 슬픔과 안타까움과 자기 포기의 절망에 압도된다. 그러나 그 박탈감이 분노를 동반할 때는 그것은 사랑의 박탈이 아니라 소유물의 박탈이다. 진정한 사랑은 신선함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소멸은 양자의 문제이다. 신선함을 잃은 사람의 문제이기도 하고 더 이상 신선함을 느끼지 않는 다른 편 사람의 문제이기도 하다. 552쪽”
하지만 독자는 소설이 가지고 있는 힘을 전제로 독서할 필요가 있다.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읽으며 아동성애자를 떠올린다거나, 발자크의 ‘나귀가죽’을 읽으면서 인간의 욕망에 초점을 둔다면 여기에는 작고 큰 오해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저자의 전작인 ‘나스타샤’에서도 비슷한 비판들이 있었던 것을 알고 있다. 소설은 주인공(저자)의 시점으로 진행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문화, 사회,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으로 단순히 표현되는 문장으로만 읽혀서는 안 된다. 여기에는 사유와 반성이 필요하다. 독서는 읽는 행위를 넘어서 잔잔한 시간 속에 몸을 맡기고 자유롭게 상상하는 것도 포함시킨다. 물론 인내와 고난도 요구된다.
나 역시도 삶을 물으면서 외로움을 느꼈다. 외로움을 느끼면서도 이를 발견하려고 애썼던 이유는 단순하다. 좋은 삶을 살고 싶었다. 그리고 타인을 사랑하고 싶었다. 생각해 보면 내 삶의 목표성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었다. 나를 사랑해야 타인을 사랑할 수 있었고, 나의 한계를 인정해야 타인의 한계도 인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저자도 이러한 것을 무수한 시간 속에서 경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의 젊은 시절이 지나가고서야 이렇게 담백한 글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진정한 자존감은 환한 데에서 남보다 낫기 위해 애쓰기보다 어두운 골방에서 스스로와 대면했을 때 충족된다. 꿈이 실재를 가능하게 하고 허수가 실수 체계를 가능하게 하듯이 그리고 예술가의 환상이 현실적 삶의 비루함을 극복하게 하듯이 암흑은 빛을 더욱 빛나게 한다. 좋은 삶은 어둠 속에서의 분투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삶은 생각처럼 어려운 것도 아니고 상황에 그렇게 구속된 것도 아니다. 어느 쪽이 어려운 것일까? 남과 대면하는 것과 자신과 대면하는 것 사이에서. 빛과 어두움 사이에서. 289쪽.”
현재 나는 상처와 아픔을 경험하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그들의 상처는 대부분 ‘정서적인 어려움’에 있다. 외롭고 슬프고 절망스러우며 좌절을 경험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단 한 번도 그들은 사랑의 언어를 듣지 못했다고 말한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사랑에 의미가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전해주는 좋은 삶은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가정’을 의미한다. 미친듯이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에 있어서 돈이라는 엄청난 가치를 공부에 부여된다. 그리고 이것을 부모가 줄 수 있는 사랑이라고 진술한다. 부모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자원으로서 사랑이란다. 만약 이 사랑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자녀는 불효자라는 실패의 타이틀을 얻게 된다. 절망과 좌절만 남은 채로.
그래서 이제 의미 자체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행위는 의미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태도에서 시작된다. 반성과 사유로 사건을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니체는 ‘영원회귀’로,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으로 인간의 삶을 설명했다. 과거를 돌이킬 수 있는 것은 과거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 과거를 역전의 발판으로 삼는 현재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여성분이 소위 ‘애교’라고 부르며 행상하는 억지 매력이 역겨운 이유는 그 사랑스러움은 단지 꾸며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애교는 그 사람만을 향하는 무의미한 것이고 무엇인가를 목적으로 하는 물화된 사랑스러움이 쉬워. 진정한 사람스러움은 그 반대인 것으로서 지성, 따스함, 재치, 이해, 배려, 열정, 활기, 미소 등이 모두 포함된 여성적 매력이고 그 자체로서 무목적인 것이야… 부디 남편에게 ‘네게 있어 나는 무엇이냐?’고 묻지 않기를 바라. 왜냐하면, ‘내가 네가 무엇인가 보다는 내가 나 스스로에 대해 무엇인가’가 일차적으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야. 사랑은 서로 간의 진정한 독립에 기초해. 독립이 없으면 유대도 없어. 항상 스스로가 될 수 있기를 바라. 340-341쪽”
저자가 두 가지의 성(생물학적 성, 사회적 성)을 사랑이라는 주제로 소설에 표현하려고 했던 이유를 독자로서 추측해 보면 타인이 아닌 ‘자신’을 마주하려는 시도라고 생각된다. 공동체(세계)로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은 항상 자신보다 타인에 더 초점을 두기 마련이다.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고, 자신을 좋아하기보다 타인이 좋아하는 것을 찾으려고 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 고민하기보다 주변에 맞추려고 하는 태도가 편협함으로 나아가는데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의미를 부여한 채로. 자신의 의미가 아닌 타인의 의미로서.
앞서 인용한 문장을 보면 남자든 여자든, 타인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 사랑에 ‘의미’를 부여하면 그것은 언젠간 들통난다. 또한 저자는 사회 안에 만연하게 깔려있는 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편협한 사고를 하지 않기 위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고민했다. 이 시점부터 앞으로 사유의 경계가 필요할 것 같다. 의미를 부여하는 태도. 도피하려는 태도. 부정이라고 불리는 감정을 애써 감추는 태도. 완벽한 삶을 살려고 애쓰는 태도. 나는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스스로에 대한 한계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저자가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쓴 것처럼 내가 현재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삶이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고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장래 어떤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 이전에 내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도 모르겠다. 무기력과 방황이 매일 이어지고 있다. 나는 나름 애썼고 대학에 무사히 들어왔다. 대장님과 사모님은 행복에 잠겨 있다. 그들의 커다란 숙제 하나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지 않다. 어디로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완전히 어두운 밤에 어떤 빛도 없이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사람들은 서로 모순되는 얘기들만을 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판단할 능력도 없다. 입학 전에는 이제 대학 입학과 동시에 내게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나는 비로소 사는 이유와 목적에 대해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없다. 무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겠다. 누군가가 삶에 대해 말해 줬으면 좋겠다.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하는지, 어떤 심적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 나의 현재의 이 불안감과 불행의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누군가가 말해 줬으면 좋겠다. 나는 구원받고 싶다. 힘차게 살고 싶다. 누군가 삶의 이유와 목적을 말해 줬으면 좋겠다. 직업과 부가 삶의 목적일 수는 없다. 모두가 미래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물질적인 미래이다. 다들 좋은 직업을 갖고자 하고, 많은 돈을 벌고자 한다. 이것이 성공적 삶이라고 말한다. 내게는 그렇지 않다. 그런 것들이 내게는 행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거기에서 만족을 찾을 수 없다. 6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