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을 즐기지 않는 마케터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by 해서뜬


나는 쇼핑을 즐기지 않는다.

대단한 목표가 (근검절약이라거나, 환경 보호라거나)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어느 순간부터 감각을 한껏 사용해야 하는 일이 버거워져서 그렇다.


감각을 한껏 사용해야 하는 일.

다소 모호하지만 풀어 말하면 오감을 발휘해 기민하게 판단을 내려야 하는 일-정도로 설명할 수 있겠다.

그리고 원래도 쇼퍼홀릭은 아니었던 내가 무언가 구입하는 행위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지치게 된 시기를 되짚어보면 마케터가 된 시기와 얼추 일치한다.


마케터의 일이란 뭘까?

사실 잘 모르겠다. 아주 납작하게 눌러 말하면 물건을 파는 사람일텐데, 인터넷에 즐비한 마케터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아마 이런 사람들이 마케터가 되는 거겠지? 나는 여러모로 마케터로는 빵점이다) 내가 모르는 방대한 세계, 철학적인 정의가 있는 것만 같고 더욱 혼란스러워지기만 한다.


학창시절 대단한 모범생은 아니지만 속 썩이지도 않는, 다소 밍숭맹숭한 사람이었던 만큼 맡은 바 업무에 충실하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해본 적 있었다.

마케팅이 중요한 회사에 다니고 있어 공유받는 아티클이나 접하게 되는 토픽이 많았던 탓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남들이 말하는 마케팅, 좋은 마케터, 자연스레 녹아든 자기 PR에 고개를 끄덕이며 어떤 이상향-내가 담당한 브랜드에 대해 확신에 차 말할 수 있고, 마케팅에 대해 내가 일해온 방식을 소개할 수 있고, 일을 사랑하며 열정이 넘치는... 그런 모습을 그려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사회 초년생 시절 생각도 해본 적 없는 '마케터'라는 이름을 달게 되고, 만 6년을 꽉 채우고 퇴사한 지금. 조심스레 원치 않았지만 꽤 오랜 시간 동행하게 된 나의 업(業)에 대해 나름의 정의를 내려 본다면 '서포터'가 아닐까 싶다.



눈에 띄지 않는 서포터



정의란 각자의 몫이고 속한 업계, 몸 담은 회사,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속한 업계에도, 쭉 일해온 스타트업이란 조직의 특성에도, 현재의 시대상에도 마케터로서 영 어울리지 않는 내가 어쨌든 이제 와 이별하기엔 정들어버린 나의 직업과 계속 손 잡고 걷기 위해 내린 지루한 정의가 바로 '눈에 띄지 않는 서포터'다.


당연히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도움이 될 만 한 마케팅 인사이트를 전달하기 위해 내린 정의는 아니다.

굳이 설득하는 대상을 찾자면 나 자신이라고 할까?

한 때 나는 정말 마케팅을 할 사람이 아닌데, 이런 걸 마케팅이라 해도 되는 것인지,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괴로웠던 적이 있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6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를 끌고 왔기에 스스로를 설득한 단어를 찾아 열심히 꿰어 보았다.


아무리 쇼핑이 놀이가, 콘텐츠가 된 시대라지만 모든 사람이 그 행위를 즐기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다른 일을 더 즐거워 할 수 있는 사람들도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에 쇼핑이라는 취미에 발을 담근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구매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으니 그냥 그럴 때, 한국의 택배 서비스와 세련된 이커머스 시장의 수혜가 필요할 때, 슬쩍 도움을 줄 수 있느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이런 어중간한 마음으로는 폭발적인 퍼포먼스를 보이고 스페셜리스트가 되기를 준비해야 하는 나의 연차에 결코 매력적인 마케터가 되지 못 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회인은 하루의 1/3 이상을 회사에서 보낸다. 잠 자고, 출퇴근하고, 몸을 씻거나 밥을 먹는 시간까지 제외하면 남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게 어울리지 않는 옷도 계속 입고 다니면 '저 사람다운 것' 이라고 주변이 인식하게 되듯 나는 나만의 정의한 마케팅으로 나의 직업을 오래 이어가고 싶다.

할머니께 물려받아 벌써부터 부쩍 늘어가는 흰머리가 완전히 새하얘질 때까지 계속 일 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젊은 날의 매일을 고민하게 만든, 나를 잠 못 자게 한, 그렇지만 헤어질 수 없는 이 일이라면, 조금의 연결고리라도 있다면 더없이 기쁠 것이다.


그렇다면...

내 안에서 마케팅이라는 '직업'의 개인적인 정의는 연인이다. 친구처럼 정겨운 관계도, 동반자처럼 깊고 사랑스러운 관계도 아닌 그냥 연인. 너무나 다르고, 매일이 힘들고, 하지만 행복한 기억으로 함께하는 미래를 섣불리 그려보는 그런 관계.


퇴사 후 이직을 준비하는 지금은 너무나 어렵고, 밉고,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지만 차마 이 직업을 그만둘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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