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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예 Apr 28. 2020

7. 만유인력-4

내가 뜨거웠던 방식


"아가씨, 아니 그러니까 선생님은, 눈이 커서 우리 애가 좀 무서워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뭔가 좀 이렇게 꿰뚫어본다고 해야 하나. 나도 좀 움찔하게 되는데, 우리 애가 속마음까지 들키는 것 같아서 겁에 질릴 것 같아."

"네?"

"그러니까 눈을 좀, 이렇게 말이에요, 조금 작게 뜨고 얘기를 해줬으면 좋겠네, 나는. 엄마 된 마음에서는 그렇네."


서른을 훌쩍 넘은 환자의 보호자가 마스카라조차 하지 않은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젊은 나이에 자가면역성 질환에 걸린 환자를 면담하기 위해 병동에 방문해 있었다. 나는 내가 뭔가 실수라도 한 것인가 싶어서 허둥지둥거렸다. 도수 없는 안경이라도 써야 하나, 나는 고민했다.


나는 흰 자에 비해서 검은 자가 작은 편이라, 의도치 않게 오해를 많이 받는데 이건 사실 의사로서 좋은 외모는 아니라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 심지어는 새벽 2시경 의식이 흐릿해진 상태로 일에 나가야 한다며 수술로 절단된 오른손을,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없어진 오른손을 휘두르는 듯한 모양새로 허우적대던 할아버지조차 내게 아주 대단한 눈빛이라도 말할 정도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내 눈을 아주 정말 많이 싫어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아무 이유 없이 내 눈을 좋아해 주었는데, 그건 나를 당황스럽게 할 정도였다.


그는 내 눈을 좋아하는 축에 속했다. 


우리는 몇 번을 더 만났다. 그는 지방 분원 파견이 끝나지 않아서, 오프 때마다 서울로 올라와 나를 만났다. 그 당시 나는 전공의가 오프 때마다 왕복 4시간을 오가면서 고작 2-3시간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기 위해 한 여자를 만나러 온다는 것이 엄청난 의미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그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이 표현이 아주 우스운 것이, 나는 아주 열렬한 짝사랑이라도 하듯이 내 마음을 그에게 홀랑 다 주어버렸지만, 저 아한다는 말만 안 했을 뿐이다.


그의 눈은 외로움으로 멀어버려서, 그와 눈을 마주하고 있을 때면 아주 깊은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와 내가 눈이 마주치면, 서로의 외로움으로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는 마치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듯이 내 눈에 입을 맞추고는 했다.


함께 테라스가 있는 펍에서 맥주를 마시던 중에 그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이에는 신뢰가 너무 부족한 것 같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눈을 치켜떴다. 아마도 나는 그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던 것 같은데, 그는 전혀 무서워하거나 기분 상해하지 않은 채 소리 내어 파하하, 마른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이 나는 너무나 얄미워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너는 나를 왜 만나?"

"또 그 소리를 하네."

"왜 나를 만나줘?"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또 이런 말을 하다니. 그쪽은 연애 경험도 많고, 좋다는 여자들도 한 트럭인데, 나를 왜 만나요? 나는 그냥 한참 어린 후배일 뿐인데. 말도 없고, 재미도 없고, 예쁘지도 않고.


"나, 그 눈, 그게 너무 좋아."


내가 거의 핏발이 설 정도로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자 그는 그렇게 말을 했다. 내 속마음에 답이라도 해주듯이. 그는 내 옆자리로 조금 다가와서 불룩한 내 눈두덩을 매만졌다. 마치 어디에 입을 맞춰야 할지 찾는 것처럼. 그러면 그는 이내 그곳에 키스했다. 그의 얼굴이 멀어져 이미 누그러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면, 입술 께에 반짝이는 아이섀도우가 묻어 있었다. 


나는 일부러, 그걸 닦아주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나의 시선을 좋아했다. 


애무받을 때마다 파르르 떨리는 내 허벅지, 당신의 손 안에서 범람하는 내 가슴, 그 뜨거운 부분에 맞닿았던 내 등의 깊은 골짜기. 그는 이 모든 것을 좋아했고 항상 나의 살결에 목말라했지만.


처음부터 그는 나의 시선을 가장 좋아했다.


네가 그렇게 보는 게 좋아. 참을 수 없어져. 다른 사람을 그렇게 보는 건 상상도 하기 싫어.


나는 그가 내 눈을 좋아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면서 그를 생각하다 보니, 그보다는 역시 내 시선을 좋아한다고 보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봐, 얘 눈에 장난기가 가득해.


내가 실습 학생 신분으로 그와 처음 마주쳤을 때, 인턴, 전공의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며 그가 이렇게 말했었다. 옆에 앉아 있던 인턴 선생님을 툭툭 치면서 나를 가리키더니, 얘 눈 좀 봐. 장난기가 엄청 많아. 


왜 그때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이미 당신이 날 보는 시선은 잔뜩 달궈져 있었는데. 한 번도 그에게 표현한 적은 없지만, 나 역시 그의 눈을 좋아했다. 검은 자가 큰 촉촉한 눈. 나른하게 나를 쳐다보면 그 공허함에 몸서리치게 되던. 섹스하는 중에 미간을 찌푸리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보였지만 절정에 이르면 텅 비어버려 건조해져 버리던 눈.


나는 이 정의되지 못한 관계가 괴로웠다. 우리는 여전히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달라진 점은, 그리고 잘못한 점은, 우리가 결국엔 자 버렸다는 것이다. 서로에 대해 확신하기도 전에. 우리는 서로의 몸을 탐닉하는 것에 완전히 몰두해버렸다. 


나는 경험이 많지는 않았지만, 섹스에 있어서 아주 고리타분한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연인 관계에서 그런 부분이 아주 중요하다고 여길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 정식으로 사귀기 전에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자마자 나는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왜냐하면, 섹스 이외의 것은 아무런 재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사이에는 그전에 나누던 온갖 책이나 영화 이야기, 어린 시절의 추억들,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대화들이 사라졌다. 그저 알몸으로 안고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너무나도 짜릿했다. 


그렇지만 나는 역시 쿨한 여자는 못되어서, 혼자가 되고 나면, 그가 사라지고 나면, 괴로워했다. 내 자존감은 바닥까지 추락해서, 내가 그에게 섹스를 허락했기 때문에 그가 내게 더 이상 매달리지 않을 것이라고 자책했다. 오히려 더욱 원한 것은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대로, 나는 너무 어렸다. 이런 상황들이 내가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버거웠다. 밤이 되면 조바심이 나서 머리가 지끈지끈해졌다. 새벽녘에는 그와 키스하는 꿈을 꾸고 헉헉 숨을 몰아쉬며 일어났다. 


나는 그래서 그를 증오했다. 그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증오했다. 그를 사랑하고 있는 나 역시도 증오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를 너무나도 원했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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