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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예 Dec 09. 2020

10. 역겹고, 아름답고, 바스러지는 기억-3

이상한 일주일


금요일의 나머지 반


그와 나는 마주 앉았다. 우리는 사케를 몇 병이나 시켰다. 나는 가뜩이나 그 시기에 알코올 신봉자가 되어 있어서 취침 전 의식처럼 매일 맥주 한 캔을 마셔온 터라 쉽게 취하지 않았다. 취기가 돌지 않으니, 나는 재미가 없어서 더 술을 마셨다. 그와 술을 마신 것은 처음이었는데, 그는 일찍이 취한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나른해 보이는 눈이 졸려 보일 정도로 끝이 더 쳐져서, 나는 몽환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한 번 이야기가 시작되니 끝이 없었다. 내가 의대에 입학한 게 6년 전, 그러니 그와 내가 알고 지낼 수 있던 시간도 6년 이상이었는데, 왜 이제야 이렇게 알게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와 나 사이에는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나는 그가 약간 쇳소리가 섞인 낮은 목소리로 하하하, 하고 웃는 것이 좋았다. 


내가 한 달 동안 그 과에서 인턴을 하면서 여러 가지 사건 사고들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는 꽤나 귀찮은 일이었다.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어떤 사람의 커다란 실수로 인하여 그와 나는 몇 백 페이지에 이르는 서류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일과 시간에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12시가 넘는 새벽까지 외래에서 프린터기를 붙잡고 컴퓨터 앞에서 씨름을 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비상용으로 쌓아둔 A4 용지들까지 모두 소진해버렸다. 그는 약간 당황해서 오늘 내로 이걸 해결해야 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했다. 밤이 늦어서 A4 용지를 살 수 있는 곳은 없었고, 여러 병동들을 돌면서 용지를 빌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앞에 있는 호흡기내과 외래의 담을 넘었다. 말이 담을 넘은 것이지, 간호사 스테이션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그리고 A4 용지 서리를 해왔다. 내가 스테이션의 컴퓨터들을 피해서 낑낑거리며 담을 넘어오자 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결국 우리는 그 날 그 일을 아주 완벽히 마무리했다.


그때 일을 얘기하면서 그가 귀여워,라고 했나, 웃겨,라고 했나. 그렇게 말하며 그가 자리를 비웠다. 나는 그가 사라지가 갑자기 취기가 돌아서 턱을 괴고 꾸벅꾸벅 졸았다. 


아, 졸려. 집에 가고 싶다.


그맘때에 나는 웃기고 유치한 짓거리들을 아주 많이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쁜 짓들도 정말 많이 했다. 나는 불특정 다수에게 셀 수 없는 상처들을 주었다. 나는 꽤나 완벽한 가면을 쓰고 있어서, 나에 대해 잘 모르는 자들은 내가 그저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 단 한 번의 실패조차 겪지 않고, 행복한 연애를 꿈꾸는 20대 중반 여자애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나는 썩은 나무옹이들을 많이도 갖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그 상처들을 후벼 파는 재주까지 있었다. 나는 상대방이 방심했다 싶으면 그 옹이들을 자랑스레 드러내 보이고는, 야, 나 원래 이런 사람인데, 그래도 내가 좋냐? 내가 좋냐고. 자신 없으면 꺼지라고. 이런 식으로 행동했다. 


나는 내 우울에 도취되어 있었다. 우울은 내 정체성이었고, 우울한 나는 매력적이었다. 네 까짓 게? 네 까짓 게 나를 이해할 수 있어? 내 우울을 받아들일 수 있어? 나는 그런 식이었다. 내 이런 점 때문에 나를 6년씩이나 몰래 좋아했다던 내 동기조차도 혀를 끌끌 차며 나가떨어졌다. 


그래서 나는 사실 그가 내게 조금은 호감이 있나 보다, 싶은 생각이 들 때도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는 아주 평범한 취미를 가지고, 평범한 연애를 할 것이며,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좋아할 것이기 때문에. 그 역시 나에 대해 알면 와씨 큰일 날 뻔했다! 하고 도망칠 것이기 때문에. 


반쯤 잠에 취한 채로, 그리고 술에 취한 채로 그런 생각을 하자 나는 갑자기 또 나쁜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 걸어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오빠, 여기 옆에 와서 앉아요."


그가 당황을 했던가? 아닌가. 나는 내가 나쁜 짓을 할 때 주로 보이는 눈웃음을 연신 지어 보였다. 나는 알았다. 내가 별 것 아닌 농담에 헤헤 거리며 입을 가리고 웃고, 적당히 순진한 척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여주면, 그냥 남자들은 그뿐이라는 것을. 그게 다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와 안고는 약간 안절부절못하다가 이내 실수인 척 내 팔을 자꾸만 건드렸다.


시시해.


나는 그 역시 별반 다르지 않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술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시해. 정말 시시하다. 사람들은 정말 다 시시해. 나는 조금 취해서 비틀비틀거렸다. 내가 말이 없어지자 그는 약간 당황한 것 같았다.


"취했어?"

"아뇨."

"취한 것 같은데?"

"뭐 좀 취했나 보죠."

"다음 주면 바로 가네. 이렇게 끝나니까 너무 아쉽다."

"그렇죠. 저도 그래요. 오빠랑 진짜 잘 맞았는데."


선후배로요. 나는 그 말을 아꼈다. 


"우리 과 지원하지. 그럼 그렇게라도 볼 텐데."

"참나. 어이없네."

"왜."


그렇게 말하면서 그가 나를 툭 쳤다.


"그냥 뭐 가끔 보면 되죠."

"상황이 안 되니까."

그가 나를 보면서 한 템포 멈추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이내 길게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

"..근데 보고 싶을 것 같아."

"어쩌라는 건지."


나는 취해서 반말을 섞어 썼다. 그러다가 또 나쁜 짓을 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나왔다.


"자꾸 그러지 마요. 꼬시고 싶어 지니까."


나는 그 말을 툭 던졌다. 옆에서 그가 나를 뚫어지게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이런 말에 저런 반응, 너무 교과서적인 것 아닌가. 나는 그때까지도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다. 


"내가 잠깐 줄 거 있는데 집에 들를까."


아 네, 퍽이나 그러시겠지요. 정말 뻔한 레퍼토리로군. 나는 취한 상태로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속아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애를 왜 좋아했냐면, 눈이 정말 커서 호수 같았는데, 거기 빠질 것 같았어."


그의 집으로 가는 길에 그는 갑자기 신이 나서 예전 여자 친구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관심이 없었지만 관심이 있는 체해야 했기에 괴로웠다.


그가 병원 근처에 위치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가 꽤나 사랑받고 자란 부유한 집의 아들내미라는 것은 집 안에 들어가고 나서야 알았다. 사소한 가구나 가전제품들 모두가 그의 부모가 그에게 얼마나 아낌없는 지원을 하는지 알 수 있게 하는 것들이었고, 집안 곳곳에 타지에서 생활하는 아들에 대한 염려나 애정 같은 것들이 묻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로 인해 더욱이 씁쓸하고 시시해졌다.


사랑이 넘치고 그에 걸맞은 경제력을 가진 부모와, 단 한 번의 탈선 없이 수능 이후 곧바로 명문대에 진학하여, 훌륭한 학점으로 의대를 졸업한, 외모가 준수하고 성격도 모나지 않은 아들.


그런 프레임 속에서 자란 그는 얼마나 시시한 사람일지, 또한 그렇게 자란 그는 '평범하지 못한 것'에 대한 역겨움이 얼마나 심할지, 나는 알았다. 나는 맥이 탁 풀렸다. 나야말로 '평범하지 못한 것'의 온상이었기 때문에.


나는 도톰한 니트 원피스에 무릎까지 오는 부츠를 신고, 커다란 패딩 안에 파묻힌 채로 현관에 서서 그가 말한 '내게 줄 것'을 가져오기를 기다렸다. 갑자기 따뜻한 곳에 들어오니 취기를 이기기가 힘들어 나는 잠시 현관에 쪼그려 앉았다.


그가 뭔가 부산스럽게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고 그가 내게 천천히 다가오면서 의례 그 낮은 목소리로 웃는 것이 들렸다. 나는 졸려서 못 들은 체했다.


"잠깐 들어와 봐. 왜 거기서 그러고 있냐."

"이거, 신발 신고 벗기 불편해요. 그냥 여기서 줘요."


나는 더 이상 나쁜 짓을 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 귀찮았다. 그라는 사람에게 더는 궁금한 점이 없었다. 그냥 집에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폭신한 내 이불에 얼굴을 박고 죽은 듯이 잠을 잤으면.


그는 기어코 나를 일으키고는 손을 잡아끌었다. 그가 내게 이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적이 없어서 나는 약간 당황했다. 그러나 그런 행동에 설레거나 두근거리기에는 나는 이미 2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래 뭐, 일단 따라가 보자. 그러다가 잘 수도 있지. 한 번 섹스하는 것쯤이야 어려운 것도 아니지. 난 솔직히 그런 생각이었다.


나는 낑낑거리며 부츠를 벗고는 그를 따라갔다. 그는 내게 자그마한 원형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나는 패딩도 벗지 않은 채 굼뜬 동작으로 의자에 앉았다. 그는 계속해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어디선가 기타를 가져오더니 악보를 뒤적거렸다. 


'노래하려는 건가? 제발.'


나는 또다시 하품이 나오려 했다. 왜 이다지도 남자들은 기타 치고 노래를 부르지 못해 안달인 걸까? 유난히 내 주변 남자들은 내게 노래 불러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나 이외의 모든 여자들에게도 노래를 불러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노래를 시작했을 때 나는 조금 놀랐다. 평소의 장난기 어리지만 냉소적인 그의 목소리와는 조금 달랐다. 미성인 것 같으면서도 낮은 쇳소리가 섞인, 명치께 가 간질간질해지는 그런 목소리. 내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자 그는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갑자기 노래를 멈추고는 마른세수를 하며 말했다.


"아, 너무 취해서 내가 부르는 게 안 들려."


그때 내가 웃었던가? 아니면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그저 쳐다보았던가?


"내가 널 어떻게 해야 좋을까."


말이 많은 그가 말을 멈추고 내 눈을 보았다. 그의 눈은 물기가 많다는 인상을 주었고, 그건 나로 하여금 게이샤의 추억에 나오는 장쯔이를 떠올리게 했다. 아주 비극적인 결말과 구질구질한 것들. 그런 것들. 내가 이십 대 중반 이후로 절대 겪지 않으리라 결심한 것들. 나는 대답 없이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왜 그렇게 보는 거야?"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런 것들을 원했다. 나는 술에 취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눈이 조금 풀려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를 유혹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물론, 나는 그를 유혹했다. 술에 취해 발그레해진 볼로, 나를 그렇게 갈증 난다는 표정으로 보는 남자를 젖은 눈망울로 올려다보는 것이 유혹이 아니면 무엇일까?


그가 결국 내게 키스했을 때, 나는 아마도 눈을 감지 않았다. 내가 확신을 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점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변명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확실한 것은 그가 나를 원하도록 한 것에는, 내 책임도 분명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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