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고양이 두마리가 투닥거리는 소리에 잠을 약간 설쳤지만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산뜻한 햇살과 먼 이국땅의 아침 공기를 느끼며 철학자의 길을 산책하기로 했다.
하이델베르크의 철학자의 길, 이름부터 거창한 그 길에 들어서게 되면 왠지 내가 어느 유명한 철학자들 마냥 생각하며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생겼다.
구글 지도를 보면서 숙소에서 철학자의 길까지 설렁설렁 걸었는데 가까운 거리는 아니였다. 가는 길 네카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며 해가 차오른 아침 풍경을 보는데 아름다웠다.
네카강의 아침
하이델베르크의 주택가
다리를 건너고 어제 지나왔던 공원길이 아닌 주택들이 들어선 곳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다른 풍경들을 보고 싶어서 그랬는데 썰렁해도 너무 썰렁했다.
머나먼 타국 땅에 와서 남들이 평생동안 살았을지도 모르는 주택가를 홀로 지나다니고 있다는 사실에 내 스스로가 대단하게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외로움에 사무쳤다. 갑자기 내가 살던 집이 눈물겹게 그리워져서 울적하게 걸었다.
정말 지겹도록 먹었던 샌드위치와 커피
하지만 나의 울적모드는 오래가지 않았다. 아침 일찍 밖으로 나와 배가 출출한 상태여서 가는 길에 보이는 어느 샌드위치 가게에 무작정 들어갔다. 맛나 보이는 모짜렐라 치즈 샌드위치 하나와 커피 하나를 주문하고 밖에서 햇살을 맞으며 아침식사를 했다. 어찌나 맛있던지, 역시 시장이 반찬이다.
여기서 꽤나 충격적이었던 기억 하나가 있다. 이 날은 독일 벌(?)에 대해서 처음 인지하게 된 날이다. 샌드위치 가게에서 여러가지 케익들도 팔고 있었는데, 케익마다 꽤 많은 숫자의 벌들이 붙어 있었다. 내 눈에는 그 벌들이 케익을 냠냠 먹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카페 직원은 케익에 거의 파묻히다 싶은 벌들을 보고도 별 반응이 없었다.
'그래 먹어라, 맘껏 먹어 벌들아 '하는 느낌이랄까?
이후에도 곳곳에서 벌들을 엄청나게 마주하게 되었다. 밤베르크나 뉘른베르크에서도 밖에서 밥을 먹기만 하면 벌이 날아들었다. 사실 벌이 아니라 벌 같이 생긴 등애라고 불리는 곤충인 것 같았지만 말이다. 처음에는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나중에는 그려려니하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여기 사람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벌을 일상처럼 여겼던 것이었다.
철학자의 길로 가는 중
아침 식사를 마치고 약간 남은 커피를 들고서 경쾌한 발걸음으로 철학자의 길을 찾아 나섰다. 혼자라서 우울했던 마음은 맛있는 음식으로 채워졌다. 나도 참 단순하다.
철학자의 길로 들어선다
철학자의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을 발견했다. 역시나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나는 표지판을 따라 길을 계속 걸었다.
길 주위로 담높은 집들이 늘어져 있다.
철학자의 길을 일단 들어서면 다른 막다른 길은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냥 쭈욱 길이 나있는 방향으로만 가면 된다. 걷고 또 걷고 도대체 언제까지 가야 끝이나는 것인지 궁금해하다가 종국에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여행가서 보이는 내게 어색한 글자들은 다 신기하다.
가다가 보이는 사람이라곤, 조깅하는 사람. 또는 엄청나게 큰 개를 데리고 조깅하는 사람. 또는 엄청나게 큰 개 여러마리를 데리고 조깅하는 사람. 조깅하는 사람들만 가득해서 관광객 포스를 물씬 풍기며 걷고 있는 내 자신이 무안해지기도 했다.
필름카메라를 들고 간 여행, 사진이 빛에 번졌다.
색색의 꽃들과 푸르른 잎파리들이 가득한 정원 너머로 하이델베르크 시내 전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말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내리쬐는 따스한 태양빛이 스미는 벤치에 앉아서 가져온 노트에 글을 쓰고 좋아라하는 음악도 들었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온전히 내 시간을 보냈다.
하이델베르크의 시인, 아이헨도르프
철학자의 길에서 바라본 하이델베르크
혼자 다니는 여행이 덜 심심했던 것은 글쓰는 것을 좋아라하는 내 성격 덕분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광경을 목도하게 되면 앉을 자리를 찾아서 철푸덕 엉덩이를 깔고 앉아 노트를 꺼내 글을 썼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지 못하니 느끼는 기분이나 감정들을 글로 적어두며 나름의 표현을 했던 것이다. 두서없는 낙서 같은 글들이지만 시간이 흐른 뒤 들춰보니 정말 좋았다. 그 때 내가 어떤 기분을 느꼈고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떠올리며 그 날의 나를 추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카로 담아낸 하이델베르크 성과 칼 데오드르 다리
또 하나, 사진 찍는 취미도 혼자 하는 여행에서는 큰 위력을 발휘한다. 때때로 느껴지는 사무치는 외로움을 쉽게 떨쳐낼 수 있다. 아름다운 장면, 이색적인 풍경을 마주할 때마다 필름카메라를 쥐어들고 연신 셔터를 눌러대다보면 지루할 틈이 없다. 셔터스피드, 조리개를 달리해보기도 하고 구도를 바꿔보기도 하고 참 재미있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게 되면 디카로 찍을 때보다 한 컷 한 컷 더 애정을 가지고 사진을 찍게 된다. 슬프게도 필름값이 비싸서 신중하게 찍어야 한다는 경제적 이유 때문이 주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스캔, 인화할 때까지 사진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왠지모를 기대감을 가지고 결과물을 기다리게 되는데, 그 기다림이 좋다.
철학자의 길에서 바라본 하이델베르크
양해를 구할 동행이 없었기에 내가 원하는 시간만큼 마음에 드는 곳에 머물며 글쓰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혼자하는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은 이런 자유로움이 아닐까?
철학자의 길에 대한 소개가 담긴 안내판
오밀조밀 붉은 색조의 집들이 가득하다
이런 길을 계속 걷는다
어디가 길의 끝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내 체력이 닿는만큼, 내 마음이 나아가고 싶은 만큼 걸으면 되었다.
하이델베르크에서는 다양한 철학자들이 활동했었다. 그래서 '철학자의 길'이라는 명소가 생긴 것일까? 헤겔, 하이데거, 야스퍼스 같은 철학자들의 이름을 상기시켜 본다. 그들과 내가 존재하고 있는 시간은 다를지라도, 그들과 나는 같은 것을 보고 느꼈기 때문에 그것으로 그들과 내 사이에 인연의 끈이 생긴 것이라 그리 생각해본다.
아름다운 하이델베르크의 풍경을 보며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했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떠났던 유럽여행이라 정말 많은 고민에 빠져있던 때였다. 고민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여행 내내 결국 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짧은 내 생에 이렇게 인생을 치열하게 고민해봤던 시기가 있었을까?
나는 꽤 오래 걸었다. 보조배터리를 핸드폰에 연결하는 잭을 숙소에 두고 와서 충전을 못 해서 핸드폰이 곧 꺼질 상황이었다. 핸드폰으로 길을 찾고 모든걸 알아보던 나로서는 핸드폰이 없으면 여행이 곤란해지기 때문이 다시 숙소로 돌아가야 할 상황이었다. 돌아가려면 내가 왔던 길만큼 되돌아가야 함을 알기에 힘겨웠지만, 마음이 자꾸만 앞으로 더 가보자 해서 계속 걸었다.
하이델베르크의 아름다운 모습
멀리 조그맣게 보이던 칼 데오드르 다리와 하이델베르크 성을 정면에서 볼 수 있을 정도까지 걸어 왔다. 하이델베르크에서 가장 기억에 남던 곳을 꼽으라면 바로 이곳이다. 걸을 때는 상념에 빠졌다가도 아름다운 풍경을 목도하게 되면 온갖 생각들이 사라지고 그냥 행복해졌다.
여기까지를 끝으로 숙소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내가 왔던 길로 쭉 돌아가기만 하면 되었는데 올 때보다 갈 때가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돌아가는 길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발견했다. 말로만 듣던 곳을 실제로 보게 되어서 신기했다. 언젠가 이 땅에서 공부해 볼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곳 하이델베르크를 떠나면 언젠가 다시 올 기회가 있으려나? 좋은 곳을 떠나려고 할 때 항상 드는 생각이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숙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