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너비

연재 소설 입니다 : D

by Honkoni

토요일 오후, 아무리 전날 과음으로 새벽까지 술을 퍼 마셨더라라도 토요일 오후에는 웬만하면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잊지 않았다. 평소에는 일에 찌들어 있어도 주말만큼은 여자친구들을 만나서 코에 바람도 쐬고 맛있는 것도 좀 먹고 그래야 인생이 살만 하다는 게 나의 철칙이었다.

오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후 4시에, 그리고 밤 9시 반에 각각 다른 여자와의 데이트가 있었다.

나는 32살, 외국계 제약회사의 최연소 이사다. 내가 회사에서 한현준 이사라는, 외국회사 중에서도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임원 타이틀까지 달고 있는 이유는, 빽도 뭣도 아닌 바로 변호사 자격증 때문이다. 22살에 사법고시에 패스 한 이후, 군의관을 거쳐서 27살에 역시 최연소의 나이로 광화문에 있는 로펌에 연봉 1억을 받고 입사했다가 올해 초에 미국계 제약회사에 스카우트되었다. 연봉은? 기본급만 2억 3천이 조금 넘는다. 제약회사는 약의 특허권을 두고 분쟁 소송이 가끔 일어나는데, 일 년에 두 달 정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걸 제외하면 대체로 나는 한량이다. 인사과에서 법률 자문이 필요할 때 노무사의 새로운 근로기준법 지침 자료를 쭉 훑어보고 몇 마디 첨언해 주는 정도면 충분하다. 그리고 미국 본사와 제약 법 같은 새로운 규정이 업데이트 될 때마다 한국 시장에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인사과에 전달하는 그 정도?

크게 보면 딱 그 정도의 일을 하고 있다. 회사에서 이렇게 놀고먹는 나는 정말 한량이다. 일 없는 한량에게 돈까지 생기자 나는 그야말로 막 놀아재끼는 한량이 되었다.

10년 전 까지만 해도 신림의 녹두거리를 돌아다니며 막걸리와 맥주를 퍼마시던 내가 이제는 룸을 전전하며 도우미들 가슴에 돈을 꽂아준다. 질릴 법도 한데 도통 질리지 않는 룸싸롱의 맛. 돈 벌어서 뭐해? 이렇게 내가 돈 좀 풀어대고 써야 이 나라의 경제도 좀 돌아가고 그러는 거지. 다들 불경기라잖아. 까짓 거 내가 돈 써준다, 나는 진심으로 대한민국을 향해 적선이라도 하는 그런 마음이었다.

굳이 술집에서 여자 찾지 않아도, 듀오니, 가연이니 그 외에 이름도 듣다 보다 못한 결혼 정보 업체에서 내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소개팅이라는 명목으로 여자를 물어다 주었다. 회사에 있는 어떤 여직원 말로는 6번 만남에 300만 원 정도 가입비를 따로 내야 한다던데, 나는 가입비 조차 내지 않았다. 내가 할 일은 그저 내 시간 편할 때 물어다 준 여자를 만나기만 하는 되었다. 결혼 정보 업체에서는 희망하는 맞선녀의 조건을 물었고, 나는 무조건 어린 여자를 구입했다.

"지 잘난 맛에 사는 여자 말고요, 그냥 얼굴 하얗고, 몸매 좋고, 좀 맹하라니 만큼 착한 그런 사람 이면 좋겠습니다."

무조건 착한 여자여야 했다. 못생긴 애랑은 잘 수 있어도, 교활하고 계산적인 여자랑 잘 못 잤다가 책임지네 마네 뒷감당을 하지 못해서 코 꿰는 선배들을 셀 수도 없이 봐왔다. 그저 착하고, 헤어지기 쉬운, 내 맘대로 요리할 수 있는 착하고 멍청한 여자가 필수 조건 이었다. 울고 짜면서 이대로는 헤어질 수 없다는 말빨로 달래고 달래서 좋게 좋게 끝내야 하는 패턴은 정말 진 빠지는 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주말 점심마다 맞선을 봤고, 주말 저녁에는 2주 전에 처음 만난 맞선녀와 잠을 잤으며, 가끔 자극이 필요할 때는 룸싸롱에서 욕정을 풀었다. 역시 돈이 좋았다. 돈으로 안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가끔 대학교 친구들을 보면 항상 내가 제일 잘 나갔다. 대기업에서 일하는 친구, 또 비슷하게 고시에 붙은 친구, 사업하는 친구, 페이 닥터 등등 사회 각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친구들은 많았지만 적어도 같은 나이에서 나만큼 연봉이 많고 나만큼 여자를 많이 만나는 녀석은 없는 듯했다.

거울 속의 나는 참 괜찮았다. 키 큰 아버지 덕분에 183cm 는 훌쩍 넘었고, 체질적으로 마른 어머니를 닮아서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아서 어떤 옷도 핏감이 잘 살았다. 거기다가 뽀얀 피부에 숱 많은 반곱슬 머리까지...

나는, 능력과 외모 그리고 서글서글한 성격까지 이 시대의 여자들이 찾는 남자였다.



그 날은, 이례적으로 초저녁부터 고등학교 동기 둘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막 소주잔이 석잔 쯤 돌아갈 때쯤 함께 우리 세명은 동시에 카톡이 아닌 문자 연락을 받았다. 동문 회장이 보낸 단체 메시지는 친구 어머니의 죽음을 세 줄로 요약하고 있었다.


[부고] 58기 졸업생 최현태 모친상. 순천향대 장례식장 1월 5일 3시.


술을 마시며, 지나가는 여자 몸매 이야기, 회사 이야기를 욕설과 걸쭉한 음담패설을 주고받던 우리 셋은 문자를 보자마자 숙연해졌다. 바로 술자리를 마무리하고 택시를 타고 순천향대로 향했다. 장례식장은 생각보다 한산했고, 10년 만에 보는 현태의 모습은 만이 초췌해져 있었다.

" 고생이 많다. 힘내라."

부모의 초상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조문을 마치고 철우와 영진을 다시 마주했다.

"생각보다 좀... 휑하다?"

"우리가 좀 빨랐지 뭐...'

무엇이든 믿고 싶은 대로 믿어버리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건 나의 오랜 습관이었다. 무엇보다 최현태라는 녀석은 고등학교 때 제일 잘 나가는 녀석이었다. 나는 문과에서 약간 천재 괴짜로 통했고, 그는 이과에서 1등을 놓치지 않는 지극히 전형적인 범생이였는데 서울대 의대를 차석으로 들어간 수재 중의 수재였다. 나랑은 성향이 전혀 달라 말 한번 제대로 섞어 본 일이 없지만 의대 본과 2학년 때 자퇴서를 제출했다는 얘기를 들었고, 어느 날부터는 간간이 모습을 비추던 동문회에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약 10년 만에 장례식장에서 상주의 모습으로 만난 그의 모습은 너무도 낯설었다.

약 15년 전의 그를 감싸고 있던 빛나는 아우라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꾀죄죄한 상복을 입은 노인의 얼굴을 하고 우리들 눈앞에서 세상이 끝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근데 현태 자식, 그렇게 의대 때려치우고 지금은 뭐한대? 모습이.... 좀 짠하다"

"정확한 건 아무도 몰라. 10년이나 소식이 끊겼었잖아. 저 쪽 테이블이 현태 큰 집 식구들 같은데, 언뜻 이혼했다는 얘기도 있더라고. 현태 아버지도 지금 치매병원에 계시대.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나 봐. 이것 참..."

철우가 눈짓으로 내 뒤 테이블을 슬쩍 가리켰다. 생각지도 않았던 동창의 몰락이 당황스러웠다. 나는 소주잔을 마저 들이켜고 일어섰다.

"나 먼저 일어나야겠다. 내일 새벽같이 회사 출근을 해야 해서. 마저 고생하고, 다시 연락하자."

나는 항상 이런 자리가 어색했다. 죽음을 위로하는 자리, 어른 놀이하는 자리, 절망과 오열을 마주하는 자리. 금수저로 태어나 무지갯빛 인생을 살며 돈과 정력과 사람을 흥청망청 쓰며 살아가는 나를 조금이라도 껄끄럽게 만드는 자리. 나는 욕지기가 올라올 것만 같아서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 다시 택시를 잡아 탔다.

'우욱~'

실제로 술 때문인지, 불편한 마음에 육개장을 억지로 구겨 넣은 게 문제인 건지 구토가 올라왔고 택시를 급정거시키고는 가로수 아래에서 머리를 처박고 한참을 게워냈다. 택시 기사가 내 뒤통수에다 대고 쌍욕을 해댔다. 얼마나 지났을까? 지금은 몇 시일까? 가로수에 몸을 기대고 한참을 바닥을 보다가 고개를 쳐들었다.

[아우디와 술병]

주황색 네온사인이 깜빡이고 있었다. 아우디와 술병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값싼 상호명의 주점. 나는 홀리듯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6개가 전부인 테이블에 사람 네 명 정도 앉으면 꽉 찰 것 같은 아주 작은 바가 출입문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 막 자정이 넘은 시각 위스키 한잔만 하고 집에 가서 잠을 청할 요량 이었다.

가게에는 아무도 없었다. 특이한 건, 귀여운 고양이가 그려져 있는 벽시계가 벽지 색과 기묘하게 어우러져 인테리어를 뽐내고 있었다. 시계가 있는 술집은 처음 보았다.

비스듬히 바에 걸터앉았다. 인기척을 들었는지 주방 안쪽에서 사람이 나왔다.

검은색 타이즈에 얇은 소재의 검은색 터틀넥을 입고 짧은 커트머리를 하고 나타났다. 화장기 없는 수수한 모습에 오히려 앞도 당했다. 피부가 좋았지만 입가와 눈가에 세월을 언뜻 엿볼 수 있는 옅은 주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나를 보며 말했다.

"처음 오셨네요? 오늘은 사정상 새벽 2시까지 밖에 영업하지 않는데, 괜찮으신가요?"

"아... 예. 위스키 한잔만요. 싱글몰트로... 아니, 그냥 아무거나 주시면 됩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하더니 카나페 조금과 함께 위스크를 내왔다. 나는 그녀를 다시 쳐다보았다. 소녀스러운 향수에 더 자극적으로 끌렸다. 십 년 만에 처음으로 찾아오는 설렘이었다. 나는 그렇게 그녀에게 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