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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Feb 29. 2020

도를 아십니까, 아니 첫사랑을 아십니까

당해도 또 당하는 본격 호구 경험담

세상에는 본인이 모시고 있는 신이 너무도 좋은 나머지 길에서 나를 붙잡고 함께 믿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처음 만난 때는 열아홉 살, 지방에서 갓 상경한 새내기 대학생일 때였다.

하얀 도화지 같던 내게 한 여자가 다가왔고, 그녀는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냐고 했다. 그리고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햄버거 하나만 사달라고 했다. 나는 맥도널드에서 햄버거에 콜라까지 세트로 사 먹였다. 나는 그때 성선설을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이후로는 좀 뻔한 이야기인데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3이 들어가는 숫자의 액수를 내야 한대서 삼천 원을 냈다. 그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새 밤이 되어 있었다. 막차 버스 안에서 서글퍼졌다. 나는 왜 단품이 아니라 세트를 시켜줬을까. 코 묻은 돈으로 먹는 햄버거가 맛있었나요 아줌마. 눈 뜨고도 코 베어가는 곳이 서울이구나.

그 날 덕분에 나는 콩알만큼 성숙해질 수 있었다. 어느 날 또다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시간이 남아돌던 날이라 호기심이 생겨서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했다. 레퍼토리는 예상할 수 있는 그대로다. 함께 앉아있을 때 또 다른 수수한 차림새의 사람 2 가 살포시 다가와서 곁에 앉는다.  그들은 내게 혹시 되는 일이 없거나,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거나, 고민이 있거나, 외롭거나, 내가 좋아하는 남자는 나를 좋아하지 않거나, 아무튼 뭔가 힘들지 않으냐고 했다.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 다 준비해봤다는 식이었다. 그중 여러 개에 해당되는 여대생이었지만 제사를 지낼 생각은 없으므로 충분히 호기심을 채운 후 그들과 헤어졌다. 이번엔 커피값도 내주지 않았다. 왠지 내가 이긴 것만 같은 우쭐함이 들었다.

그 후로도 수많은 이들이 길을 묻거나, 잠깐 시간이 있냐고 하거나, 기운이 대단하시다거나, 조상님이 돌보신다고 말을 건네 왔다.
바쁘다고 하니 어떤 사람은 내 나비모양 귀걸이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비는 인연을 뜻한대요. 이렇게 만난 건 분명 인연이에요”


그래서 그에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인연이라면 또 만나겠죠 뭐”


귀걸이를 찰랑, 하면서 쿨하게 돌아섰다. 비로소 나는 칼 같은 단호함에 미소와 여유까지 곁들일 줄 알게 된 서울내기가 다 된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진짜 그런 줄 알았지.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진.

나는 무럭무럭 자라 직장인이 되었다.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저희는 연극을 하는 oo극단인데요, 어느 분이 이벤트에 참여해주셨거든요”
“네 그런데요..”
“첫사랑에게 편지를 남기는 이벤트인데 그분이 이다님에 대해 남겨주셨어요”
“..???”
“혹시 의향이 있으시면 이 편지를 전해드리고 싶어요. 원하지 않으시면 받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 이때를 생각하면 영화 인테스텔라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과거의 나를 바라보며 소리치고 싶다.

안돼..! 알겠다고 하지 마 제발. 조금만 더 상식적으로 생각해볼까?
이제 나이도 먹었잖아. 그리고 그거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이잖아?

하지면 영화에서도 그렇듯이 그 목소리는 전해지지 않았고 나는 그 편지가 너무 읽고 싶어 져 버리고 만다.

누군가의 첫사랑이 된다는 건 정말이지 거역할 수 없을 만큼 로맨틱한 설정이었다. 뻥이라고 해도 믿고 싶을 만큼. 나를 아직까지 마음 한편에 남겨두고,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그 남자는 과연 누구인가. 나는 a부터 z까지 찬찬히 머릿속에 줄을 세워두고 한 명씩 심문을 거쳐보았지만 여전히 아리송했다. 그래서 조금은 더 설렜다. 그럼 걔네 말고 또 다른 인물이..? 이 죽일 놈의 호기심.

결국 편지를 건네받기 위해 퇴근 후 만나기로 했다. 사람 많은 카페이니 별 일 있겠어, 라는 생각도 하면서.


그들의 레퍼토리는 이랬다.


1. 극단에서 나왔다며 한 남자가 인사를 하고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이벤트에서 지목된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나 뭐라나.
2. 곧 또 다른 여자가 도착하고 늦어서 죄송하다며 옆자리에 앉는다. 포인트는 그거다. 순수해 보이는 척, 나처럼 어색한 자리 인척.
3. 건네받은 편지의 내용은 대한민국의 모든 모쏠까지도 다 끄덕일 수 있을 만큼 진부하고 짧은 사랑 고백이되 여운은 좀 남길 것.

극단에서 나온 남자는 극본을 쓰는 작가이기도 하다고 했다. 다른 일을 하다가 뒤늦게 글쓰기에 빠져 혼을 불태우고 있다는 아주 솔직한 자기 이야기까지 곁들였다. 그들은 내게 많은 관심을 보이며 나를 궁금해했다. 그리고 우리 셋은 삶과 인연과 꿈과 가치관에 대해서 너무나도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한 친구들과도 자주 나누지 않을 그런 이야기들은 보석같이 반짝였다. 다만 그게 가짜라는 게 문제지.

4. 옆에 앉은 여자애는 우연히 이야기하게 된 척 겸연쩍게 서울대 대학(원?) 생임을 밝혔다. 그다음이 중요한데 마침 심리학 설문조사를 하고 있는데 한 번 도와줄 수 있느냐고 하는 것이다. 이번엔 남자의 연기도 좀 필요한데 “아, 그러면 저는 해 드릴게요”라고 말하며 나를 슬쩍 보는 거다. 그러면 나는 선량하고 친절한 사람이어야 하니까 그쯤은 저도 해드릴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까지 왔으면 거의 다 된 것이다. 특히 나의 경우처럼 마음을 열고 쉽게 즐거워하는 호구라면 더더욱. 마침! 우연히! 주말에 심리상담을 해주는 행사가 있을 텐데 함께 가자고 이야기한다. 언니, 언니, 하면서.


아. 여기까지 쓰고 나니 현타가 온다. 지금은 뻔해진 레퍼토리가 그때의 내겐 왜 신선했나. 그들과 헤어진 후에야 나는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고 다시는 연락을 받지 않았다.
우연과 우연이 반복되는건 필연이 아니라 연극이란걸 너무 늦게 알았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그들은 진짜 연극단이긴 했다. 서로 모르는 척 완벽한 연기를 펼쳤다. 악은 아주 다정하게 다가온다는 말은 맞았다. 한 사람의 감정, 그가 진짜 관심 있는 것, 내면의 꿈이나 이상,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가지고 이용하는 건 그들의 신이 어떤 분인지랑 별개로 악이 맞지 않나.

아무튼 나는 그렇게 또 당했다.


팍팍한 사회생활에서 ‘첫사랑’이라는 단어는 달달한 꿈같았는데. 꿈이랑 현실 사이 거리가 너무 멀었다. 날 속인 둘이 씩 웃는 상상을 하니 약이 올랐다. 거짓말하는 사람들 다 망했으면. 돌아오는 길에 폰을 확인하니 내가 그 자리에 나간다는 걸 알고 마음에 걸려하던 회사 동료에게 카톡이 와있었다.


“이다 씨 별일 없지? 아직 살아있는 거지?”


현실 속 진짜 관심과 애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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