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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Jun 05. 2019

수련회 촛불 앞에서 우리가 울었던 이유

뻔하고 사소한 엄마 이야기



어린 시절 수련회에 가면 촛불을 앞에 두고서 꼭 엄마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면 웬만한 아이들은 울었다. 사람 울리는 데는 역시 엄마만한 단어가 없다. 우는 아이들은 대부분 둘 중 하나의 이유로 운다.


- 엄마가 있어서. 혹은 엄마가 없어서. 


대한민국에서 ‘엄마’라는 건 ‘모성애’와 한 세트를 이루는 참 진부한 한 단어다. 너무 쉬워서 한 인간이 보통 처음 스스로 내뱉게 되는 말. 그리고 그 뻔함이 슬프다. 엄마들의 삶은 너무나도 예정되어 있는 것만 같아서. 뻔함을 따르지 않으면 손가락질 받고, 따르면 슬퍼지게 마련인 삶들.


우리 엄마로 말할 것 같으면,

'몹시 뻔하다.'


내가 자라날수록 엄마는 수련회 촛불 따위 없이도 그저 떠올리면 눈물이 나는 대상이 됐다. 아빠 없이 혼자 나를 키워냈던 삶은 아빠라는 역할의 ‘뻔함’도 대신 짊어지고 가는 길이었다. 그렇게 남들보다 두 배로 무거웠기 때문에 어쩌면 조금은 더 뻔하고 슬프고. 내 생각엔 그렇다.


엄마의 소풍 가방에는..


엄마가 여행을 가게 된 어느 날이 생각난다.

일도 하면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와 나를 챙기느라 여유 부릴 틈이 없던 엄마가 떠나는 동창들과의 특별한 외박 여행. 마땅한 여행 가방도 없어 내 가방을 빌렸다. 전날 밤 모습이 첫 소풍 앞둔 볼빨간 초등학생같았다. 가방에 짐을 넣었다, 뺐다 반복하던 엄마.


“이건 너무 짐이 되려나? 아니야, 안가져가면 후회할까?”


겨우 하루를 자고 올 거면서 어찌나 재고 따지던지. 나와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무거운 줄도 모르고 짊어지고 온 엄마인데. 긴 시간 동안 그렇게 걸어와 놓고 하룻밤 소풍날 가방이 무거울까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뻔함이 나를 슬프게 했다. 어떤 시인은 우리 생이 소풍같은거라고 노래했는데 우리 엄마의 어깨에 놓인 건 한 시절 즐겁게 놀고 가는 소풍 가방치고는 좀 무거운 것 같다.


그래서 기대해보기로 했다. 앞으로 엄마의 가방엔 뭐가 담기게 될까. 나와 가족들이 아닌 엄마만의 다른 무언가.


엄마는 사실 시인이다


시를 써서 (제출하기만 하면 되는 것 같지만) 등단이라는 걸 했다. 문학회에도 나간다. 그런데 시를 안써. 시를 지독히도 안 쓴다. 시를 안 쓰는데 시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쨌든 어릴 적 꿈이 책방 주인이었다던 엄마의 가방엔 분명 시인이라는 글자가 들어있다. 그 두 글자는 엄마를 두둥실 떠오르게 하는 헬륨 풍선 같아서 삶을 걸어가는 발걸음을 자꾸만 가볍게 해주는, 그런 마법 같은 글자일테다.


나는 엄마가 문학회 출판 마감일에 쫓기며 겨우겨우 시 몇 편을 써내는 사람이라도, 일 년에 단 며칠간만 시를 쓴대도, 평생 그렇게 시인이었으면 좋겠다. 엄마의 가방에 시인이라는 설레는 단어를 평-생 담고 갔으면 좋겠다. 


실 가는 데는 바늘이 필요했다

어느 밤엔가 엄마 옆에 붙어 자면서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 엄마는 왜 아빠한테 나를 안 두고 데리고 왔어? 어린 나이에도 참 무거웠던 질문. 뻔했지만 내뱉으며 좀 아렸던 질문. 엄마도 아프게할까봐 걱정됐지만 꼭 묻고 싶었던 말.


바늘 가는 데 실 가는거지.


어둠 속에서 엄마의 목소리만 들려왔다. 엄마에게도 그 답이 무거웠을까? 그 무게감이란 한낱 가벼운 실 같은 나로서는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 당시의 엄마만이 알겠지. 


바늘과 실. 당시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 적절한 표현이다. 우리 엄마는 살아가며 뾰족해졌다. 나를 꿰고 여기 저기 뚫고 다니며 길을 내야했으니까. 엄마는 사실 뾰족한 사람이 아닌데. 원체 둥글고 모난데 없는 사람인데. 점점 더 가늘어지고 뾰족해지는 바늘을 떠올렸더니 마음 한구석이 뭔가에 찔린 것만 같다.


무튼 우리 엄마는 그렇게 뻔한 엄마다.


그런데 말이지, 뻔해보이는 그 삶을 겪어내는 사람들에게는 사실 하루하루가 하나도 뻔하지 않을거다. 그래서 이렇게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참 쉽지가 않다. 내가 쓰는 한낱 언어로는 엄마의 특별한 삶을 이렇게 진부하게밖엔 그리지 못할거라서. 늘 진짜 이야기는 우리가 쓰는 언어, 그 너머에 있다. 나는 감히 그 삶을 조금이나마 담아내보려는 서툰 몸짓 하나 이렇게 해볼뿐.


촛불 앞에서 우리가 울었던 진짜 이유


사람의 일생이란 게 어떻게 보면 참 뻔하다.

하지만 각자에겐 그 뻔함이 특별하지 않은가.

손에 쥔 저마다의 촛불 앞에서 우리가 울었던 이유는

각자의 뻔한 엄마가, 각자의 진부한 삶이 사실은 유일무이하고 특별해서다.


뻔한 걸 특별하게 바라봐주는 일.

그래서 그 앞에서 눈물 흘리게 되는 일.

다른 말로는 이걸 사랑이라고도 부를 수 있으려나.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힘은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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