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로 뽑아낸 듯 한치의 오차도 없는 작품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난다. 사람 몸보다 큰 종이에다 한 글자 한 글자 붓끝을 바로 세운 채 천천히 써 내려갔을 그 몸짓이 그려진다.
붓끝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삶을 흔들었던 순간들을 마음에서 얼마만큼 비워내고 또 비워냈을까. 그래서 올곧은 붓글씨를 보면 되려 내 마음은 출렁이곤 하는 것이다. 할머니가 마음에서 몰아냈을 그 흔들림이 내게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아서.
할머니는 치매노인을 위한 주간학습센터에 다닌다. 얼마 전 종이 하나를 가지고 돌아왔다. 펼쳐보니 제법 반듯한 글씨로 노인 인생 수칙 같은 것들이 쓰여있다.
'말을 적게 할 것이며 지혜를 가지고 분노하지 말 것이며...'
힘 있고 단단한 필체였다. 유치원생이 또박또박 써놓은 듯한 순진무구한(?) 단단함이랄까. 한 글자 한 글자를 귀찮다는 말 없이 또박또박 끝까지 써 내려갔을 할머니를 생각하니 너무도 대견하여 꼭 안아주고 싶었다. 이거 정말 할머니가 쓴 거야?? 너무너무 잘 썼다!! 라며 칭찬했는데 할머니는 온 마음을 다 해 써놓고선 당신이 써놓은 걸 전부 잊으셨다. 이걸 누가 썼냐며 처음 보는 문장인 것처럼 종이를 들고 한 글자씩 읽어보셨다.
'말을 적게 할 것이며... '
우리는 모두 서툰 상태로 시작한다.
처음 글씨 쓰기를 배울 때 유독 연필로 꾹꾹 눌러쓰며 묻어나던 진한 흑심, 그 질감은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잘 쓰게 되지만그만큼 하고 싶은 말도 더 잘하게 됐을까. 더 쉽고 빠르게 쓰는 글자 뒤로 노련하게 마음을 숨기는 법을 배워왔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흐르면 아이는 노인이 되고 우리는 다시 서툰 사람들이 된다.
얼마나 높이 튀어 오르든 중력을 따라 결국에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얼마나 높이 올라섰느냐 보다도 올라가며 무엇을 보았는지 어떻게 보았는지가 더 중요한 여행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는 돌아오게 될 테니까. 점점 서툴러지는 건, 우리가 높이 올라가며 이 삶에서 배워왔던 것들을 다시 놓는 과정이다. 원점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거다. 이 여행을 끝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거다. 할머니의 글씨에서 그걸 보았다. 거꾸로 흐르는 시간을.
우리 할머니는 어떤 말들을 기억하고 또 어떤 말들을 잊어가고 있을까. 나는 할머니가 아팠던 말들, 아팠던 장면들을 내려놓으면서 서툰 사람이 되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부딪쳐보지않아서, 아파보지 않아서 마냥 해사하게 웃는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