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접경지역을 위협하는 군 사칭 사기의 실체와 우리가 지켜야 할 신뢰
“군인이라 해서 믿었습니다. 말투도 단정했고, 군 문서까지 들고 왔어요. 그런데 음식값을 대신 입금해달라는 부탁 이후로는 연락이 끊겼죠.” 경기 연천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영순(가명) 씨는 최근 자신이 겪은 피해를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누군가 군 간부를 사칭해 단체 식사를 예약한 뒤 대금을 대납해달라고 요청했고, 결국 50만 원의 손해를 입었다. 군인이란 말에 의심 없이 문을 열어준 결과였다.
최근 이와 같은 피해 사례가 접경지역에서 잇따르고 있다. 군인 혹은 군부대를 사칭해 음식 주문을 하거나, 허위 공문을 보내 대금을 미리 송금받고 사라지는 방식의 사기. 그 수법은 정교했고, 피해자는 주로 군 부대 인근 자영업자들이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사기범들이 군 내부 용어나 부대 명칭을 매우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군 경험이 있는 자이거나, 부대 구조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으로 추정된다.
군에 대한 지역사회의 신뢰를 악용한 이 범죄에 육군 5사단이 빠르게 대응에 나섰다. “군은 대금을 대납하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예방 포스터를 제작하고, 군 문서와 간부 신분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전용 연락처(031-835-2888)를 안내했다. 또한 이 포스터는 연천군청을 통해 지역 상인회, 음식점, 마트, 숙박업소 등에 배포되고 있다.
포스터 하나에 담긴 군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군은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진짜 군인은 정당하고 투명한 절차에 따라 움직이며, 금전 문제에 개인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따라서 누군가가 군의 이름으로 돈을 요구하거나, 예약 후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기다.
군 사칭 사기의 피해 유형은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단체 예약을 해놓고 나타나지 않는 ‘노쇼’는 기본이고, 위조된 공문서로 물품을 요구하거나 협조 요청을 가장한 접근도 늘고 있다. 피해를 입은 상인들은 하나같이 "군인을 믿었기에 의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믿음이 깨졌을 때 느끼는 상실감은 단순한 금전적 손해를 넘어선다. 그것은 ‘군’이라는 존재가 주는 상징과 명예, 그리고 그간 쌓아온 신뢰의 균열이기 때문이다.
사실 군과 지역사회는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군 장병들은 외출·외박 시 지역 상점을 이용하고, 지역 행사에 군이 참여하며, 지자체는 군의 주거와 문화생활을 지원한다. 전통시장 상품권을 지급하고, 군 장병을 위한 복지 연계를 하는 사례도 많다. 이런 관계는 단순한 경제적 연계를 넘어, 일종의 정서적 동반자 관계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사기 사건은 단지 몇몇 개인의 일탈로 끝날 일이 아니다. 군과 지역이 맺고 있는 신뢰 체계 전반이 흔들릴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며, 이 신뢰를 지키기 위한 공동 대응이 필요하다.
군은 보다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단순한 포스터 배포를 넘어서, 군 장병들에게도 사칭 피해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는 교육이 필요하다. 군 간부들은 실제로 지역 상인들과 마주하는 경우가 많기에, 본인이 직접 오해받지 않도록 명확한 행동 매뉴얼을 숙지해야 한다. 반대로 자영업자나 지역주민들도 부대 연락망이나 확인 절차를 숙지할 수 있도록 하는 민·군 협력 체계가 필요하다.
나아가 군, 지자체, 경찰, 지역상인회가 함께하는 ‘사칭 범죄 공동대응 협의체’를 구성해 실시간 정보 공유, 피해 대응 매뉴얼 구축, 신고 보상 체계 마련 등의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군의 명예를 지키는 일은 군만의 책임이 아니며, 지역이 함께 참여해야 실효성이 있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사기극이 아니다. 이는 군이라는 조직이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상징성과 명예, 그리고 사회적 신뢰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군복은 단순한 제복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 앞에 선 맹세이며, 질서와 사명감의 상징이다. 누군가 이 옷을 흉내 내 범죄를 저질렀을 때, 가장 큰 상처를 입는 사람은 바로 오늘도 그 옷을 입고 국방을 수행하는 진짜 군인들이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쌓이지 않지만, 한 번의 사기로 무너질 수 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사기를 조심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군과 지역이 함께 실질적인 방어막을 구축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방어막은 제도와 교육, 그리고 경각심에서 시작된다.
군인의 이름이 더 이상 사기꾼의 도구로 사용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경계하고 대응해야 한다. 진짜 군인의 신뢰를 지키는 싸움은 지금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