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그렇게 또 지나간다
테슬라에서 인턴을 시작한 지 9주가 지났다. 벌써 절반을 훌쩍 넘겨버린 채 한 달의 시간을 남겨두고 있다. 매일 아침 같은 길을 나서며 버스를 기다리곤 한다. 탁 트인 경치 앞에는 넓게 자리 잡은 엘리자베스 호수가 보인다. 이사가기 전 집을 찾아보고 있을 때 옆에 센트럴 파크가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주말이 되면 스케이드장에 사람들이 가득 들어서고, 여유롭게 호수 주위를 거니는 노부부들이 보인다. 신나게 잔디 위를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선글라스를 낀 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가족들, 수많은 자동차들이 공원 앞 주차장을 메운다.
8:30 AM. 출근 시간에 바라보는 공원은 조금은 허전해 보인다. 종종 찾아오는 흐린 날씨와 더해질 때면 묘한 기분이 들곤 한다. 버스에 오르면 익숙한 사람들의 얼굴들이 보인다. 이름 하나 모르지만 서로의 모닝 루틴을 꿰뚫고 있다. 오피스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친근한 사람들이 버스에 입장한다. 말 한 번 섞어본 적 없지만 동시에 줄을 당겨 같은 정류장에서 내린다.
9:30 AM. 공짜 커피 한 잔을 내리고 자리에 앉는 시간이다. Medium Brew에 Small 사이즈를 선택한 뒤 커피를 내린다. 설탕 반 봉지에 흰 우유를 넣어 휘휘 섞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커피는 대략 2시간 동안 아껴마신다. Standup 미팅과 몇 가지 오전 미팅을 흘려보낸 뒤 식어버린 커피 한 잔. 씁쓸한 뒷 맛을 뒤로하고 VSCode를 킨다.
12:30 PM. 배가 상당히 고픈 시간이다. 아침에 지적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비해 버렸기 때문에 밥을 반드시 먹어야만 한다. 꼬르륵 소리가 크게 들릴 때도 있다. 한국인 인턴 친구에게 연락을 넣은 뒤 후다닥 카페테리아로 내려간다. 대기업이니 점심은 공짜인줄 알았는데. 음식 무게에 따라서 돈을 내는데, 오늘은 거대한 치킨 덩어리가 나와 최고치를 경신했다. 뼈나 국물이 있는 음식이면 그 가격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진짜 15달러가 말이 되냐.
1:30 PM. 허기진 배를 달래고 나니 갑자기 나른하다. 실제로 과학적 근거가 있는 현상이다. 음식을 소화하기 위해 뇌는 에너지를 소화기관에 집중 분배한다. 반대로 뇌를 굴리는 데에 에너지가 부족하니 졸음이 몰려오는 법이다. 그렇다고 진짜 잠이 오진 않는다. 퇴근 시간을 향한 갈망만이 늘어난다.
3:30 PM. '할 게 없네' 라고 생각할 때가 제일 위험하다. 귀신같이 수리해 뒀던 티켓은 QA 엔지니어들에 의해서 새로 오픈된다. Jira 보드를 계속해서 새로고침을 하다가 To-Do로 옮겨진 티켓이 보이면 흠칫 놀라곤 한다. 요즘은 디자이너 피드백을 많이 받는다. 얼마 전 팀에서 배포한 페이지의 인터페이스가 마음에 안 들다는 것이다. 인정한다. 거의 한 시간이 넘게 채팅을 하며 수정된 버전을 디자이너에게 보여주고 컨펌받기를 반복한다. 끝끝내 최종본이 나왔을 때의 UI는 훨씬 단정되어있다. 정신없이 코드 수정하고, 메시지 작성하고, 질문 이해하고를 반복하지만, 마무리가 되었을 때의 쾌감이 있다. 결과물을 눈에 담는다. 보람차다.
4:30 PM. 딱딱하고 각진 2층짜리 오피스를 빠져나온다.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움직여야 할 때.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노트북과 충전기를 가방에 집어넣고 1층으로 내려온다. 주차장 방향의 조그마한 헬스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최소 주 3회 운동을 목표하고 있지만, 보통 2회를 한다. 하체를 안 한지 얼마나 됐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운동하시잖아, 한 잔해.
6:30 PM. 저녁밥 한 숟가락을 뜬다. 배달을 시켜 먹거나 한인마트에서 사온 고기를 구워 햇반과 먹는다. 거의 유일무이한 지출이다. 정말 음식에 밖에 돈을 쓰지 않는 것 같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밥이라도 잘 먹어야지.
8:00 PM. 릴스와 숏츠를 번갈아가며 본다. 링크드인 포스트들을 중간에 섞기도 한다. '그만 봐야지', 그만 봐야지 되뇌이지만 멈출 수 없다. 안 멈춰지는 걸 어떻게 해! 온갖 도파민 중독으로부터 정신을 차리고 의자에 앉는다. 책을 읽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한다. 가끔은 롤을 하기도 하고, 개인 프로젝트를 위한 코딩을 하기도 한다. 그날그날의 무드에 달려있다. 센치해진 날에 글을 쓴다. SNS 중독이 되어버린 나의 정신을 방어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11:00 PM. 일단 침대에 눕는다. 기상 알람을 진동으로 맞추는데, 기숙사 생활을 오래하면서 생긴 습관이다. 소리로 맞추면 옆 방 룸메이트가 깨버릴지도 모른다. 전자파에 직격타를 맞을 것을 감수하고도 어쩔 수 없이 배게 뒤에 폰을 숨겨두고 눈을 붙인다. 물론 다시 숏츠를 정독하다가 자버리니 12시에나 잠에 드는 셈이다.
일상은 늘 그렇듯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다. 큰 틀은 바뀌지 않고,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사소한 변동사항들이 자리한다. '반복'은 지루함으로 이어진다. 같은 문체와 단어 선택들이 반복진다면 이 글이 지루해지듯, 익숙해져 버린 일상은 나를 따분하게 만든다.
하지만, 과연 나의 '하루'는 정말 '반복'되고 있는 걸까?
오늘은 어제와 다른 시간에 회사에 도착한다. 1, 2분 차이 밖에 나지 않지만 엄연히 다르지 않나. 오늘 처리해야 할 업무들은 어제와 다르다. 새로운 태스크에 맞춘 새로운 코드를 작성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매니저와 미팅을 하기도 하고, 급하게 릴리즈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헬스장에선 또 다른 운동과 루틴을 시도해 보고, 처음 보는 음식점에서 저녁을 시켜 먹는다. 심지어 오늘은 처음으로 브런치에 글을 써본다!
작은 변화들을 눈치채는 것. 소소한 행복에 감사하는 것.
무료한 일상을 보람찬 하루로 바꿀 수 있는 비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