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삶의 유한성. 사라지는 것들에게 바치는 이야기.
우리는 누구나 태어나서 죽는다. 탄생과 죽음 사이의 시간들을 채워나가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몫이고, 흘러가는 무용함은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다. 대개 인생이 괴롭다고 할 때는 이 무의미한 시간을 어떻게 유의미한 사건들로 채우는가에 대한 고민에서 온다. 사람은 선형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므로, 삶을 오롯이 '살아내야' 하는 입장이다. 모든 번뇌와 괴로움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전반적으로 글에서 진한 감정이 묻어난다.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골똘히 생각하고, 가려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려 노력하며, 함부로 무언가를 재단하려 하지 않는 모습이다. 특히 예술 작품에 새겨진 삶의 모습들에 주목하며, 막이 내리면 그저 부유할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 실체화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고, 이미 사라져 버린 감상들을 활자로 남기려 부던히 노력하고, 세상에 발자취를 남긴다는 예술의 특성에 주목하는 모습이 좋았다. 심연과 희망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모습 또한 위태하지만 강해보였다. 깊이 우울의 수렁에 빠져들지 않고, 제 모습을 찾아 도처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자세. 내가 늘 꿈꾸고 바래왔던 자세였다. 특히 저자는 프랑스에서 지내며 타지인으로서 느끼는 공간에 대한 이질감과 온전히 나로 살 수 있는 환경에 대한 만족감을 모두 가진 사람이라는 점이 특징적이었다.
이질감, 즉 낯선 감각이란 무엇인가? 내가 아닌 듯한 행동을 할 때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낯선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새로운 곳에 갔을 때 보이는 풍경들, 처음 간 장소에서 느껴지는 생경한 바람 또한 낯섬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된다. 그렇다면 삶 전체로 보았을 때는 어떨까. 만나보지 못한 유형의 사람을 마주하고, 경험해보지 못한 분야에 발을 들일 때 스스로를 둘러싼 모든 것을 순식간에 낯설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낯섬은 필연적으로 익숙함에 잠식되는 습성을 가진 듯하다. 감각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사람의 몸은 체득된 경험을 잘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렇게 새로움을 겪고 경험을 쌓아가는 것을 삶의 매커니즘으로 삼게 된다. 나는 이 자체가 인생에서 의미를 찾는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에 낯설게 다가가, 많은 것에 익숙해지는 것. 다름을 새로움으로 받아들이고, 의아함을 궁금증으로 발현시키는 것. 사고의 흐름이 삶의 자세에 끼치는 영향은 상당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한 끗 차이로 세상을 보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을 믿는다. 저자는 바로 이 지점에 통달하여 우리에게 많은 경험을 전해주려는 듯하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만족감이란 무엇인가? 책을 덮은 후, 나는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만족하는 순간과 일치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만족이란 꼭 긍정적인 감정만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슬픈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릴 때도 만족스럽고, 화창한 날씨에 사람들과 산책하며 웃을 때도 만족스럽다. 마음이 충만해진 상태, 나는 이것으로 만족을 정의했는데, 저자도 아마 비슷한 맥락에서 결론을 지은 듯했다. 그녀는 작아진 자신을 당당히 드러내게 되었을 때 비로소 스스로의 춤을 느끼고, 근본에 슬픔이 자리잡고 있는 시간예술이라는 것을 사랑하여 부지런히 공연을 본다. 생애 처음으로 혼자됨을 느낀 후 비로소 고독에 만족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흐름에서 나왔다. 구속받지 않는 내가 되어, 암전 속에서 느낀 설렘들이 저자에게 만족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나로부터 먼 것, 멀어서 찬란하게 꿈꿀 수 있는 것을 품고 있는 것이 바로 저자가 사랑하는 예술이다. 나는 온전한 만족은 저 먼 허상에 있어 죽을 때까지 그것을 느끼지 못할 것 같다는 일종의 허무함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계속해서 주어지는 퀘스트를 깨는 게 삶 같았고, 어디까지나 그 굴레 안에서 돌다가 벗어나지 못한 채 끝이 날 것만 같다는 생각이 깊었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되려 잔존 가치가 있는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 책이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그리하여 앞으로는 퀘스트를 깬다는 것에 주목하기보다 가지 못할 것 같았던 먼 우주에 점점 도달하고 있다는 과정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같은 맥락에서, 소멸에 지고 나서도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모든 것을 알아도 생을 사는 이유는 살아야지만 삶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살아야지만 당신을 보기 때문이다. 당신의 말을 당신의 입으로부터 듣고 싶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삶을 바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구절이다. 삶의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을 모두 안다고 하여 살 의미가 사라지는가에 대한 해답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산다는 것은 사실 간단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스쳤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떠내려가는 와중에 돌멩이도 줍고 바람도 느끼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인사하는 것이 바로 인생을 살아낸다는 것이라는 사실. 우리는 그래서 산다는 것에 있어 너무 많은 의미를 두며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 모두가 본연을 찾으려 살아가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기어코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책은 타국에 머무르며 공연을 감상한다는 특별한 상황 속에서 느낀 감정들이 묘사되어, 작품 하나하나를 함께 보며 이야기하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치 저자가 나와 함께 공연을 보러 다니는 동행자 같기도 하고, 장 끌로드 아저씨처럼 독자들에게 환한 다정을 선물하는 사람 같기도 했다. 어떤 맥락에서 느끼든, 사라지는 것들의 의미에 주목한 저자의 모습이 현재의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는 것은 변함없다. 내가 받은 감명이 무형적이라는 사실 또한 저자가 줄곧 말하는 예술의 시간차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록
나는 기록에 중독적으로 매달리는 사람이다. 뭘 하나 지나치지 못하고 사진을 찍어두거나 메모를 하고, 날아가는 생각을 그대로 날려버리기가 싫어서 억지로라도 써두는 편이다. 그런데 문득 기록에 회의가 든 적이 있었다. 보고 싶다고 체크해 둔 것들을 내가 살면서 다 볼 수 있을까? 이것저것 넓게 저장해둔 것들이 과연 나에게 도움이 될까? 혹은, 너무 다양하게 저장해두어서 오히려 간만 보게 되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좀 안일하게 살면서 쉬어 봤더니, 그게 더 이상했다. 결국에는 다시, 일상을 날리는 게 싫어서 일기도 꼬박꼬박 쓰고, 감상도 자주 남기고, 저자처럼 특히 시간예술의 감상에 집중하여 쓰고 남기고 공유하며 지낸다. 글도 퇴고를 많이 하는 편이라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리지만, 이렇게 쓰는 시간이 나는 전혀 아깝지 않다. 예술은 실체가 없어 내가 극장에서 나오기만 하면 사라져버리는 것일지 몰라도, 그 기억과 공간이 준 느낌은 무형으로 온전하다는 생각 때문. 어쩌면 글로 형상화된 감상은 정말 영원히 사람들에게 회자될지도 모른다. 이것이 내가 무의미하다 여겼던 기록과 감상에 빠져들게 된 근본적인 이유다. 언젠가 두고두고 이야기될 거라는 것, 그래서 내 흔적이 세상에 남게 된다는 것. 이것이 내가 예술을 사랑하게 된 매력 포인트였고, 꾸준히 기록하며 사라지는 것들에 주목하는 이유다.
하나 웃긴 이야기가 있는데, 영등포에서 스필버그 감독의 <파벨만스>를 보고 너무 강렬한 감정을 느꼈다. 아직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는데, 한줄평으로 쓰고 싶은 문장이 생각나 바로 상영관을 나와서 왓챠피디아를 켰다. 생각나는 대로 필터링 없이 마구 적느라 에스컬레이터도 제대로 타지 못할 뻔했고, 사람들과도 부딪힐 뻔했다. 근데 갑자기 이러고 있는 내가 너무 웃겼다. 몇 분만 걸으면 안전한 공간이 나올 테고, 그 사이에 내 모든 감정과 생각이 날아가지도 않을 텐데, 기를 쓰고 이 자리에서 기록하려는 스스로가 너무 웃겼다. 하다못해 지하철 기다리면서 써도 되지 않은가. 모르겠다. 아주 필사적으로 그 순간에 모든 걸 쓰고 싶었다. 더 날아가기 전에, 충만하게 다가온 이 감정이 더 휘발되기 전에. 아무튼 이런 걸 보면 난 기록 중독자가 맞는 것 같다. 그리고 사라지는 것을 붙잡으려 너무너무 바쁜 인간인 것도 맞다. 제발 날아가지 말고 다 남아줬으면.
이 책을 읽으면서도 필사하고 메모하느라 너무 바빴다. 많은 걸 이해하고 싶어서 오랜 시간 동안 붙잡고 이해하려 노력했다. 이틀은 꼬박 이 책에 매달린 것 같다. 그런데도 여전히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3번 읽으면 비로소 저자의 삶에 들어가 볼 수 있을까? 내가 읽은 에세이 중에 가장 심오하고 어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연극이라는 예술에 익숙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좋아서 또 하루 종일 이렇게 노트북을 붙들고 타자만 치고 있다.
사라짐의 효용
사라짐을 예술에 한정해서 본다면 아쉬움에 가까운 감정이 먼저 떠오른다. 내가 느낀 이 좋음, 통쾌함, 슬픔을 머리에서 글로 바로 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내가 주구장창 이야기하는, 생각이 바로 글로 구현되었으면 좋겠는 마음. 그런데 결국 사라지니까, 내가 남겨두지 않으면 이 부유하는 것들이 결국 날아가니까, 많은 이들이 기를 쓰고 쓰려고 노력하는 것 아닐까 싶다. 좀 더 넓게, 사라짐을 인생 전체로 본다면 당연한 흐름이라는 키워드가 생각난다. 사람도 언젠가 사라지는데,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굴복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사라짐에서 시작한 허무가 우리를 잠식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 같다. ‘모든 것이 어차피 사라질 텐데, 이토록 애쓸 필요가 있을까?’ 하는 마음 같은. 가볍게 생각하는 건 좋지만, 모든 게 부질없다는 식으로 가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허무를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에에올의 조부 투파키처럼. 모든 세상을 등지고 감정을 제어하려 하지 않는 등의 허무주의로 빠지지 않고 그 선을 잘 지키는 것이 과제 아닐까. 그런데 세상에 이걸 통달한 정답자도, 마땅한 해답지도 없다는 게 문제인 거지만.
사라짐이라는 게 있기에 우리가 앞을 보는 게 아닐까? 모든 게 그 자리 그대로 남는다면 우리가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설까? 노력하지 않아도 모든 생각이 나에게 남아있다면 우리가 과연 사유하고 기록하려 할까? 세상 전체로 보았을 때 사라짐은 반드시 효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인생의 과제를 남기는 것도 어쩌면 사라진다는 특성일지 모른다. 우리를 굴러가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사라짐에서 시작된 동력이다.
예술의 사회 고발
‘예술이 사회를 향해 고발하더라도, 잠깐의 험악함일 뿐, 결국 세상은 그대로 돌아간다’라는 식의 구절이 있었다. 맞는 것 같았다. 흔히 선동이라고 하지, 우르르 욕하다가 우르르 해산하는 것. 우리나라가 특히 심하다고 생각한다. 팩트를 체크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대중들의 열광에만 동참하는 현상 말이다.
예술 작품에서 한 현상을 고발한다. 관람객들은 공감하거나, 야유한다. 그들이 돌아가며 기록한다. 기록은 세상으로 퍼지고, 또다시 찬반이 갈리며 논쟁거리가 된다. 이 과정에서 힘의 위선이 작용할 수도, 무지성 깎아내리기가 될 수도 있다. 어찌됐건 공연은 시간이 지나면 종료된다. 사회적 논의 또한 언젠가는 종료된다. 말이 행동이 되지 않으면, 모든 것이 그대로다. 그 이후로 어떤 자세를 취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다. 행동이라는 키워드로 뭉개는 게 지금 나의 최선인 것일까?
예술이 지녀야 하는 주제란?
조금 다른 방면에서, 무대에 올릴 만한 소재는 무엇일지 고민해봤다. 추악한 이면을 드러내는 것이 좋은 걸까, 미화하여 아름다움으로 포장하는 것이 좋은 걸까? 전자가 무대에 오른다면 관객에게 불쾌함만 남길 것이고, 후자가 무대에 오른다면 만족스럽게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후자만 계속해서 무대에서 살아남을 수도 있다. 찝찝한 기분이 드는 작품을 내 돈 주고 오는 관객은 적을 것이므로. 감정만큼 정직한 것은 없으므로.
갈림길에서 같은 방향만 선택한다면 우리는 그 길의 풍경만 보며 살게 된다. 꽃이 피고, 푸르르게 널려있고, 사람들이 웃고 손뼉 치는 세상. 환하게 빛나는 세상. 그러나 검은 물이 흐르고, 쓰러진 나무가 더 많고,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 없는 다른 갈림길도 있다는 것은 잊게 될 것이다. 그 길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곳을 택한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도무지 기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기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처음부터 모를 수도 있다. 이것이 예술이 반드시 추악을 지녀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관객이 예술에게 부여하는 일종의 사회적 책임이다. 무엇이든 처음에 알려야 사람들이 퍼뜨리고, 그래야 논의라도 시작될 수 있으므로.
예술과 예술가
예술과 예술가는 다른 차원의 것일까? 나는 이 얘기가 나오면 홍상수 감독을 빼놓을 수가 없다. 나는 그의 영화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첫 번째 이유는 찝찝해서, 두 번째 이유는 불쾌해서, 세 번째 이유는 사람들이 추앙하는 것에 대항하고 싶어서. 일종의 반항심이다. 그러니까 나는 예술과 예술가를 떼어놓고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만드는 사람의 삶이 오롯이 녹아있는 게 예술인데, 어떻게 그것을 따로 놓고 볼 수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논란이 된 사람들의 작품은 모두 읽지도 보지도 쓰지도 않는 편이다. 비록 그것이 예술적으로 훌륭하다 할지라도.
더 현실적으로 말하면, 그들에게 수익이 돌아가기 때문도 있다. 자발적으로 그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안겨주고 싶지 않다. 속된 말로, 누구 좋으라고? 나는 그들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을 살피기에도 바쁘다. 그런데 당당히 말할 위치일까 내가. 불현듯 내가 지나쳐버린 생각이 있었던 것도 같아서 섬뜩하다.
도덕주의와 심미주의
도덕주의와 심미주의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나는 원래 철저히 도덕주의파였는데 최근 들어 심미주의적 입장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로 예를 들자면, 인생이 순탄하진 않더라도 그 속에서 무언가를 얻어가는 주인공을 좋아했고, 타임라인 안에서 내가 현실을 살며 가질 수 있는 교훈을 주는 영화를 더 좋아했다. 흔히 말하는 ‘보고 남는 게 있는’ 영화. 근데 최근에 사누최, 몽상가들, 중경삼림을 보면서 예술은 뭐든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주인공들이 그 속에서 어떤 식으로 표현하든, 예술 속이니까 다 흐린눈 해줄 수 있다는 생각. 그래서 일탈하는 사람들, 불륜하는 사람들, 무단침입이나 도둑질 등도 아무렇지 않게 보았다. 예전의 나였으면 이런 장면이 나온 순간부터 별점 후두둑 내렸을 거다. 결국엔 말하고자 하는 알맹이가 없네, 하면서 비웃었을지도 몰른다.
그런데 가끔 냉소적인 내가 될 때는 여전히 얻어가는 영화를 찾기도 한다. 그런데 이제는 그냥 ‘예술은 예술일 뿐’이라는 말에 작게 나마 동의하므로, 유영하는 주인공들에게 좀 더 너그럽게 되었다. '그래, 이런 인생도 있구나.' 하면서 오히려 경험하는 데에 의의를 좀 더 두는 사람이 되었다.
<헤어질 결심>을 두 세 번 다시 볼 때도 난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최근에 5점에서 4.5로 별점을 내렸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처연한 사랑에 불륜이라는 소재만 없었다면 더 완벽하지 않았을까 싶어서였다. 내가 많이 너그러워졌다 해도 이 사랑에 불륜이 끼어든 건 참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아름다운 피사체에 한 방울 어울리지 않는 물감이 떨어진 것만 같아서 너무너무 아쉬웠지만 결국 반 개 내렸다. 이 러브스토리와 비포선라이즈의 러브스토리를 도저히 동급에 둘 수 없었달까. 그 후에는 사람들의 평을 하나하나 다시 읽어봤다. 사랑의 연출은 인정하지만 소재 때문에 불쾌했다는 말도 많았다. 아직도 이런 것에 공감하고 있는 날 보면 사실 여전히 도덕주의에 가까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상황에 따라 유도리 있게 움직이는 관객인가? 우유부단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답은 없으니까, 언젠간 내 생각도 정립되기 마련이라고 생각하련다.
희생
누군가 이기면 누군가는 반드시 지는 게임. 세상이 꼭 그런 것만 같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희생되어야만 누군가는 살아남는 세상. 서바이벌 속에만 있는 얘기는 아니다. 태초에 집터를 구할 때도 그랬고, 밟고 올라서 승진하는 지금도 그렇다. 경쟁 사회가 불필요한 희생을 자초시키는 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모두가 웃으며 살면 좋겠어요, 그런데 그게 가능하냐 이 말이다. 나조차도 성장하려는 이유는 좋은 것을 얻기 위함인데, 내가 그걸 얻으면 누군가는 그걸 못 얻게 될 거다. 내가 가지면 남은 가지지 못하고, 내가 받는 건 누군가가 만든 것이다. 이런 철학적 사회적 질문은 도무지 어떻게 결론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나도 이 굴레 안에서 사는 인간이라 어쩔 수 없는 것도 같다.
제목의 의미
모국어는, 우리의 언어다. 그런데 가장 모르겠는 언어이기도 하다. 내가 표현하는 감정이 이 단어로 표출되는 게 맞을까? 떠다니는 감각을 어떤 표현으로 나타내야 하는지가 늘 고민이다. 무형의 것을 유형으로 표현하려 하니 생기는 아이러니다. 그래서 모국어가 낯설다.
'차라리 우리 다른 걸 하자. 차라리 우리 집에서 쉬자.' 차라리는 최선 말고 또 다른 선택을 할 때 쓰는 말인 것 같다. 이것 말고 다른 것을 의미하는 말.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쓰는 말 말고 차라리 다른 말을 쓰자. 최선의 선택이 좌절되었을 때 택할 수 있는 또 다른 선택지를 살피자.' 이런 의미 아닐까 생각해본다.
침묵. 조용하고 고요한 상황이 연상된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진공 상태에서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아무도 말하지 않고, 무엇도 소리내지 않는 상태. 그래서 평화로운 상태. 그러나 소음이 끼어들면 이 세계는 와르르 무너질 것이다.
모든 걸 합해본다면, 우리의 언어는 고요함으로 표상될 때 더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모국인들조차 잘 모르고 있는 모국어로 하는 발언보다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작가의 세계에서는 더 좋았다는 뜻인 것 같기도 하다. 침묵이 답답함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도리어 고요함에 주목할 수 있었다는 그런 긍정적인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