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한 상태는 나에게 두려움이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면 어쩌지? 이대로 감정도, 감각도 사라지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기뻐야 정상인 순간에 웃음이 시원하게 나지 않는 것과 슬픔이 가득한 순간에 울음이 나오지 않는 것 중 나는 후자가 더 두렵다. 내 안에 연민이란 게 사라져 버린 느낌. 모든 곳이 텅 비고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 같이 아득하다. 찔리긴 했는데, 분명 시리게 아프긴 한데 눈물이 나지 않는 순간은 늘 껄끄럽다.
그러나 맺히지도 흐르지도 않고 자기만의 공간 속에 갇혀 있던 그 응어리가, 분출되지 못하고 쌓여가던 비애가 결국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순간은 반드시 온다. 그럴 땐 울기 위해 우는 척을 한다. 한 번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드디어 엉엉 울 수 있을 것 같아 반갑기까지 하다. 맘껏 흐느끼기 시작하면 금방 아무도 모르게 대성통곡할 수 있다. 입을 막고서라도 조용히 눈물을 빼내야 했던 순간들이 기억난다. 기필코 슬픔을 씻어내야 했던 주기적인 아픈 밤들. 나는 그렇게 멍함을 이겨내 왔다.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어떤 이벤트처럼 고요한 눈물의 시간이 돌아오기를, 이번에는 좀 더 빨리 찾아와 주길 기대하면서.
나는 <벌새>의 영지 선생님 캐릭터를 무척 아낀다. 손가락 열 가락을 움직여보며 살아있음을 느껴보라는 영지 선생님의 표정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은희가 집이 싫으면 영지 선생님께 달려간 것처럼 나는 슬프면 가끔 바닥에 누웠다. 등이 아파올 때까지 시리도록 정적을 느끼며 가만히 있다 보면 영지 선생님 생각이 그렇게 났다. 누군가 나에게 그렇게 다가와줬으면. 가벼운 것부터 할 수 있게 도와줬으면. 볼을 차가운 바닥에 대어야 겨우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던 내게도 버젓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증표가 필요했다. 이를테면 아직까지는 몸을 내 의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썩은 마음이 내 육체와는 관계없다는 것. 간절한 마음에 그 작은 몸짓을 따라한 적도 많다. 오밀조밀하게 움직이는 손가락들이 괜찮으니 고개 들어 일어나보라는 것 같았기 때문.
최근에는 산책에 맛을 들여 미련하게 볼을 혹사시키지는 않는다. 누구의 시선도 느끼지 않으며 걷다가 고개를 젖혀 강아지 구름을 상상하고, 지도를 보지 않고 하릴없이 직진하는 본능을 깨우다 보면 나는 저절로 멍해졌다. 내가 싫어하던 멍함이 아니라 가벼운 멍함이 정말 쉽게 날 찾아와 줬다. 발은 땅에 붙어 있지만 마음은 날아갈 듯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그렇게 풀을 만나고 해를 맞으며 점점 건강해지는 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르게 말하자면, 건강한 방식으로 슬픔을 해소하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다. 혼자 하는 산책이 주는 환희를 모두가 알게 되기를. 그리고 나보다는 조금 더 빠른 시일 내에 실행해 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