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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혁 Nov 18. 2023

저녁의 위로

우리는 저녁으로 뇨끼와 파스타를 먹었다. 트러플 오일이 들어간 뇨끼와 라구 파스타. 느끼하고 매콤한 맛이 어색한 듯 어울렸다. 윤정은 메뉴를 잘 골랐다며 흡족해했고 나는 아리송한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윤정은 화이트 와인을, 나는 레드 와인을 글라스로 주문했다. 윤정은 부족한지 나중에 한 잔을 추가했다. 나는 한 잔 만으로도 얼굴이 빨개져서 놀림을 당했다. 가성비가 좋은 거라고 대꾸하니 윤정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최근에 직장에서 겪었던 일들로 떠들다가 시간이 다 갔다. 레스토랑을 나온 시간은 열 시 언저리였다.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워 괜히 시간을 끌었다. 이 시간에 갈만한 곳이 있겠어? 윤정의 말에 나는 얼른 검색해서 열한 시까지 영업하는 카페를 찾아냈다. 그럼 열한시 되기 십분 전에 나오자. 나 막차 끊기겠어. 윤정은 그렇게 말하며 서둘러 걸어갔다.


바 형태의 카페였다. 주광색 조명이 뜨문뜨문 놓여있고 잘생긴 남자 셋이 바 안 쪽에서 바쁘게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모두 머리가 길었고 허리춤에 새하얀 앞치마를 둘렀다. 토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빈자리가 없었다. 우리는 오 분 정도 기다리다가 겨우 자리를 잡았다. 사람이 많지만 시끄럽지는 않았는데, 다들 옆에 앉은 사람들과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커피가 나오자마자 대뜸 윤정에게 물었다.

“요즘 힘들지 않아?”

“뭐가?”

“그냥, 이래저래.”

순간, 윤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금세 다시 돌아왔지만 분명히 봤다.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얼른 말을 덧붙였다.

“내 생각엔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그래. 요즘 가족도, 일도... 충분히 힘들고 괴로운 상황일 수 있는데 너는 늘 아무렇지 않으니까. 물론 누구한테도 기대지 않고 씩씩하게 사는 게 보기 좋아. 멋져. 하지만...”

윤정은 바람이 빠지는 풍선처럼 웃었다.

“난 아무렇지도 않아. 왜 자꾸 그런 걸 물어봐? 너가 자꾸 그런 질문을 해서 오히려 더 신경쓰여. 혹시 내가 지금 잘못 살고 있는 건지, 문제가 있는데 놓치고 있는 건지, 그런 걱정이 든다니까.”

나는 입을 다물었다. 무겁고 진득한 정적이 테이블 위를 천천히 흐르다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커피 농도는 괜찮으세요?”

우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웃으며 다른 손님들 쪽으로 갔다. 윤정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에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슬며시 내 손을 잡았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진심이야. 그치만 난 정말 괜찮단 말야.”

“응, 알겠어.”

그러나 나는 알지 못했다. 윤정이 괜찮은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건지. 짐작도 안됐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타인의 마음을 알아채는 건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는 것보다 더 막연한 일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힘들면 얘기할게. 그런 거 얘기할 수 있는 사람, 너 뿐이야. 정말로.”

“알겠어.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너 뿐이야.

윤정의 말은 내게 닿지 않고, 과녁을 벗어난 화살처럼 어딘가로 끝없이 날아갔다. 문득 아주 커다란 우물 속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자 둥글고 까만 하늘이 보였다. 별이 가득해 몹시 아름다웠지만, 그게 다였다.

“그만 일어나자. 너무 늦었어.”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생긴 점원들이 우리에게 인사하며 환히 웃었다.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비현실적으로 멋진 미소였다.


밤은 어둡고 차가웠다. 우리는 얼른 주머니 속에서 손을 잡았다. 지하철까지 걸어가는 동안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 받으며 실컷 웃었다. 우리의 말과 웃음은 하얀 입김과 함께 허공으로 흩어졌다. 주말 저녁 번화가의 열기는 추위 탓인지 예전보다 한풀 꺾인 느낌이었다.

지하철에 들어가 모니터를 보니 열차가 삼 분 후 도착 예정이었다. 우리는 손을 놓고 잠깐 서로를 바라보았다. 윤정이 말했다.

“갈게.”

“응.”

내가 가만히 있자, 윤정은 안아달라는 듯 팔을 뻗었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를 안고 등을 토닥였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말이 새어나왔다.

“고생했어, 고생했어....”

“고마워.”

윤정은 내 눈을 보며 밝게 웃었다. 나도 웃었다.

삑, 소리를 내며 그녀는 플랫폼 안쪽으로 들어갔다. 손을 흔들기에 나도 마주 흔들었다. 검은 머리칼이 계단 아래로 조금씩 내려가다가 곧 사라졌다. 어렴풋이 땡땡땡, 하는 열차 알림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는 열차인지, 나가는 열차인지 알 수 없었다. 윤정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웃고 있을까, 아니면 울고 있을까?

나는 돌아서서 코트를 단단히 여몄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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