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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혁 Jan 25. 2024

껍질

냉장고는 거의 비어있다.

김이 다 빠진 오백밀리 콜라 하나, 사놓고 몇 년째 쓰지 않은 튜브형 와사비 하나,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고춧가루가 조금. 하지만 고춧가루는 유통기한이 상관없지 않을까? 건조 식품이니까. 건조한 것들은 오래간다. 마음 같은 것도.

그리고 어제 사다놓은 귤이 한 봉지. 이건 정말 괜찮을 것 같다.

“귤 먹을래?”

그녀는 모로 누운채 내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한다.

“아니.”

“너 귤 좋아하잖아.”

“아닌데? 누구 얘길 하는 거야?”

나는 입을 다문다. 다른 사람이었나? 괜한 소리를 꺼냈군. 모른척하고 귤을 세 개 꺼낸다. 작지만 딴딴하니 달 것 같다. 소파에 앉아 커피 테이블 위에 귤을 나란히 놓는다. 귀여운 아기 삼형제 같다. 아기 삼형제 귤. 크기는 둘째가 가장 크고, 꼭지는 셋째가 가장 예쁘다. 첫째는 껍질에 거뭇거뭇한 흔적이 묻어있다. 그래도 어쩐지 제일 당도가 높을 것 같은 기분. 그래, 그냥 기분일뿐이다.

“누구 얘기 한 거냐고.”

그녀가 다시 묻는다. 나는 차렵 이불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등과 허리와 골반을 훑으며 생각한다. 누구였을까? 귤이 좋다고 한 사람. 내 기억 속에 흐릿하게 남은 기억의 주인은 누구지?

“너 맞아. 정확히 말하면 귤은 아니고, 오렌지.”

“아.” 그녀는 그제야 목소리를 누그러뜨린다. “기억났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쿡, 웃는다. 나는 그 미소가 영 탐탁지않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산등성이에 있는 도서관에서였다. 왜 도서관이 그런 곳에 있는 걸까? 오르막으로 된 골목을 한참 올라갔다. 한겨울이라서 옷을 겹쳐 입었고, 덕분에 땀을 뻘뻘 흘렸다. 그런식으로, 나는 늘 적절한 온도를 맞추지 못한다.

도서관을 좋아하진 않는다. 할일이 없어서, 그저 시간을 때우러 갔다. 그녀는 도서관에서 일하는 네 명의 사서 중 하나였다.

“어떤 책 찾으세요?”

쪼그려 앉아 책을 들여다보는 내게 그녀가 물었다. 삼십 분째 여기저기 서성이는 게 신경쓰인 모양이었다. 나는 찾는 게 없었다. 굳이 따지면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찾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말장난 같아서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과일.”

“네?”

왜 그렇게 말했을까. 도서관에 가면서 시장을 지나쳤기 때문일까.

“과일과 관련된 책이요.”

그녀가 곧바로 물었다.

“어떤 과일이요?”

두 번째 관문.

나는 잠깐 생각한 뒤에 대답했다.

“... 포도.”

“포도?”

“샤인머스켓.”

그렇게 말하고나서 자괴감이 들었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무슨 헛소리를... 이번만이 아니다. 나는 늘 나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이런저런 짓들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샤인머스켓에 관한 책이라면 이쪽으로.”

그녀는 앞장 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무시할 수가 없어 따라갔다. 그녀는 D-202 구역에서 두꺼운 과일책을 하나 꺼냈다. 컬러 사진이 많은 책이었다.

“과일의 역사에 관한 책이에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아요. 전 원래 과일에 관심이 없었는데, 이거 읽고 오렌지가 좋아졌어요.”

“왜요?”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직접 읽어보시면 알아요.”

“그렇군요.”

나는 그 책을 빌렸다. 하지만 오렌지의 역사는 결국 읽지 않았다. 대신 그녀와 종종 자는 사이가 됐다. 종종 잘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녀가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그녀는 씻고 나와 내 옆에 앉는다. 귀여운 아기 삼형제 귤은 여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테이블 위에 놓여있다. 그녀는 둘째를 집어 껍질을 깐다. 네 조각으로 나눠서 하나를 먹고 하나는 내 입에 집어 넣는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귤을 씹는다.

그녀가 묻는다.

“뭘 쓰고 있어?”

“영화 평론.”

“어떤 영화?”

“헤어질 결심.”

“재밌네.”

“뭐가?”

“내용이 우리 같잖아?”

나는 잠깐 생각해본 뒤에 말했다.

“어떤 점이?”

“어떤 점이냐니? 생각할 것도 없이 당연한 걸.”

그녀는 드라이기를 켠다. 뜨거운 바람으로 긴 머리를 말린다. 머리카락과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진다. 머리는 화장실에서 말리라고 삼십 번 이상 말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듣지 않는다. 늘 거실에서 머리를 말리고 뒷정리도 하지 않는다. 정리는 항상 내몫이다.

“너도 날 절벽에서 떠밀 셈이야?” 하고 농담처럼 물어본다.

그녀는 대답이 없다. 대체로 그녀는 대답이 없다.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린다. 글을 쓴다. 정말 쓸데없는 짓이다. 아무도 모르는 블로그에 누구도 보지 않을 영화 평론을 남긴다. 그건 누구와의 소통도 아니다. 나 자신과의 소통도 아니다. 다만 나는 그게 이불에 묻은 먼지 같다고 느낀다. 훅 털면 위로 떠올랐다가 천천히 바닥에 떨어진다. 먼지다. 그리고 또 다른 먼지가 내리길 기다리는... 그런.

그녀의 남편은 고등학교 때까지 야구 선수였다. 스윙 실력은 좋았지만 가수라는 꿈 때문에 드래프트를 포기했다. 오 년 정도 지방을 전전하며 노래를 불렀고 그즈음 그녀를 만나 결혼했다. 결혼 후에는 경기도의 유리 공장에서 일했다. 그후엔 노래를 그만두고 야구 코치를 준비했다. 일 년 정도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공장 지붕 청소를 하다가 떨어지면서 모든 게 어긋났다. 남편은 더이상 일하지 못한다. 일뿐만 아니라 다른 무엇도 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칠 년째 돌보고 있다.

“가야겠어.”

그 말 뒤에 날 기다리고 있어, 라는 말이 메아리처럼 따라붙는다. 물론 착각이다. 그녀는 옷을 챙겨 입고 거울을 본다. 머리를 만지고, 화장을 다듬고, 오른손 엄지로 입술 가장자리를 쓱 훔친다. 마지막은 늘 똑같다. 습관 같다. 오른손 엄지로 입술 끝을 쓱. 나는 의자에 앉은 채 고개만 돌려 그녀의 모습을 지켜본다.

“춥겠다.”

“어쩔 수 없지.”

그래, 정말 어쩔 수 없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귤 두 개를 집어 든다.

“가져갈래?”

그녀는 흘깃 돌아보더니 고개를 젓는다.

“가는 길에 오렌지 사가려고.”

안녕, 이라는 인사도 하지 않고 그녀는 밖으로 나간다. 솜씨 좋은 도둑처럼 조용히 문을 열고 쓱 빠져나간다. 문이 닫히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현관의 빈자리를 눈길로 채운다. 가득 채우느라 한동안 시간을 보낸다.

들고 있던 귤을 까 먹는다. 남은 건 아기 삼형제 귤 껍질 세 개. 냉장고 문을 연다. 냉장고는 텅 비어있다. 분명 귤이 한 봉지 있었는데? 보이지 않는다. 콜라도, 와사비도, 고춧가루도...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귤껍질을 냉장고 안에 집어 넣는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다. 이제 냉장고는 거의 비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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