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늘 취해있었다. 아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쨌든 겉으로 보기엔 항상 취한 것 같았다. 꾸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 천천히 팔자로 걸었다. 말투는 언제나 느리고 어눌했다. 발음이 너무 부정확해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할아버지의 곁에는 2리터짜리 pet병 소주가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제사를 지낼 때 할아버지는 몹시 진지했다. 옛 선비들처럼 옷을 갖춰 입고 격식을 따졌다. 그때는 모든 게 빈틈없이 정확했다. 제사의 형식과 순서, 제반사항에 대한 숙지는 완벽했다. 다들 무언가 궁금하거나 헷갈리는 게 있으면 할아버지께 여쭈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망설임 없이 답해줬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시골 농사꾼의 태도 같지 않았다. 그런 게 늘 신기했다.
가끔씩 나를 불러 집안의 내력에 대해 설명해주곤 했다. 누렇게 바랜 족보집을 꺼내서 늘어놓고 우리 집안의 시초, 어르신들의 이름 같은 것을 하나하나 이야기해주셨다. 그리고 내가 몇 대손인지에 대해 언급하며 꼭 기억하라고 했다. 그럴 때만큼은 명확한 말투로 힘주어 말씀하셨다. 남다른 자부심마저 느끼시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영 믿기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족보를 사고파는 일이 무척 많았다고 배웠다. 우리가 그런 집안 같지는 않은데. 몇 대에 걸쳐 기록할 만큼 대단한 집안이었을까? 나는 그런 게 궁금했다. 그래도 할아버지에겐 묻지 않았다. 내가 몇 대손이었는지는 금세 잊어버렸다.
할아버지는 농사꾼이었다. 자기 힘으로 다섯 명의 자식을 떳떳하게 키우셨다. 체구가 작은 편이셨는데도 일할 때는 힘이 넘쳐 보였다. 세상이 바뀌어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손해였지만 그래도 계속하셨다. 소를 키우고, 경운기를 끌고, 밭을 일궜다. 시골에 가면 양파나 감자, 과일 같은 게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나는 어렸고 과일보다 과자를 좋아했다. 할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과자를 준비해두셨다. 옛날 과자였다. 설탕이 잔뜩 묻은 젤리, 약과, 쌀과자 같은 것들. 나는 그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줘도 거의 먹지 않았다. 나는 어렸다.
어느 순간 갑자기 할아버지는 기력을 잃었다. 병원 신세를 오래 지고 시골집으로 돌아왔을 땐 더 이상 농사를 짓지 못할 정도였다. 할아버지는 그때부터 거의 방안에만 계셨다. 남아도는 시간은 술을 마셨다. 당신의 자식들과 며느리들이 볼 때마다 설득하고, 화를 내고,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듣지 않으셨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얼굴이 벌갰고 눈은 마치 소처럼 촉촉했다. 살아갈 이유 같은 걸 잃어버린 표정이었다. 나중에는 그냥 하고 싶은 거 하시게 두자는 말이 나왔다. 할아버지에게 남은 시간은 별로 없었다.
내게 개인적인 말씀 같은 건 전혀 하진 않으셨다. 그 시절 어른들은 다들 그랬다. 뭐가 힘들다거나, 고민이라거나, 좋거나 싫거나, 그런 얘기는 일절 하지 않으셨다. 마치 프로그래밍된 기계처럼 늘상 같은 패턴의 말씀만 하셨다. 우리 집안 내력을 알아라, 공부 열심히 해라, 밥을 골고루 잘 먹어라. 나는 그런 것보다 할아버지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지나간 시간들을 어떻게 돌아보는지 그런 게 궁금했다. 그렇지만 너무 어려서 그런 걸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들 슬퍼하긴 했다. 그러나 마음의 준비는 이미 몇 년 전부터 되어 있었다. 그래서 다들 의연했다. 나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단지 내 할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슬플 수는 없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깊이 이해하지 못했고 인간적으로 마음을 나누지도 않았다. 그건 누군가의 잘못이라기보단 그저 시대와 세대의 자연스러운 흐름일 뿐이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죽음 자체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죽음을 대하는 태도 때문에 슬펐다. 그리고 아쉬웠다. 왜 더 많은 걸 물어보지 않았나. 왜 먼저 다가갈 용기를 내지 않았나. 모든 게 지나버린 뒤에 느끼는 후회들. 그런 것이 내 마음을 할퀴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