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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박 Nov 16. 2019

신임교수에게 텃세를 부리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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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과 교수들이 신임 교수에게 텃세를 부리는 방법은 간단하다. 학과 수업을 배정해주지 않거나, 폐강될만한 수업을 주는 것이다. 아직 본인의 과목을 개발할 시간이 부족한 신임교수들은 기존에 개설되어 있는 교과목을 맡을 수밖에 없는데, 선임 교수와 학과의 배려가 없다면 책임 강의 시수를 채우기 어렵다.


첫 학기는 어영부영 뭐가 문제인지도 모른 채 시작되었고, 매일매일 강의를 망치지 않고 진행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학기가 끝나갈 때 즈음,  다음 학기에는 최대한 강의 준비를 미리 해놓아야겠다는 열망이 무척 컸다. 망설이다가 학과장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다음 학기에 제가 어떤 수업을 하게 되는지 해서요. 이번엔 미리 준비를 좀 하고 싶어서..."

"아직 정해진 게 없습니다 교수님."

"아.. 실례지만 대략적으로라도 알 수 없을까요?"

"선임 교수님들하고 얘기를 해봐야 되는데... 정해지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학과장 교수에겐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조교로 부터 나에게 배정된 과목이 무언지 들을 수 있었다. 2학점짜리 한 과목이었다. 학기당 12학점의 강의를 해야 하는 나에게, 10학점을 다른 곳에서 알아서 채우라는 것인가.


다시 학과장을 찾아갔다.


"학과장님, 아시다시피 제 책임시수가 12학점인데요."

"그렇죠 교수님, 제가 도움을 좀 드려야 하는데... 학과 차원에서 드릴 수 있는 수업이 많지 않네요."

"......."

"제가 교양대학에 한번 연락을 해보겠습니다."


교양수업이든 뭐든, 주기만 하면 감사히 받아야 했다. 어떻게 한다 해도 내 책임 강의시수를 모두 채우기는 역부족이었다. 다른 학과의 교과편성이 다 끝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를 그렇게까지 코너로 몰고 싶었을까.


재임용 심사에서 책임 시수를 채우지 못한 교원은 불리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서든, 책임 학점을 다 채울 만큼의 강의를 받아내야 한다. 급한 마음에 교무처장에게까지 면담을 신청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지난 학기에도 책임 시수가 모자라서요..."

"지금은 다 결정이 되어서... 제가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때 나의 기분은 담함, 그 자체였다. 비정년트랙이지만 그래도 교수가 되었고, 한 학과의 전임교수로 안정적인 자리를 잡아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는데. 난 여전히 강의를 하나라도 더 받으려는 시간강사의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며칠 후, 다른 학과의 학과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라교수님, 혹시 저희 학과에서 과목 해주실 수 있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과목이면 해야죠!"

"감사합니다. 부탁드리고 싶은 과목은요...."


두 번째 학기를 앞두고, 난 내 힘이 닿는 곳까지 여기저기 강의를 구걸하러 다녔다. 그런 내가 불쌍해 보였을까. 지나가다 사연을 들은 타과의 노교수님은 자신이 만든 교양과목을 하나 내주셨다. 책임시수를 드디어 채웠다.


그 이후로도 한참을 학과에선 내게 충분한 강의를 배정해주지 않았다. 두 번째 학기 때 내게 전공과목을 부탁했던 타 학과는 그 후로 나를 시간강사 부리듯, 이런저런 강의들을 계속 부탁했다. 그래도 그들 덕분에, 임용 초기 시절을 잘 버틸 수 있었다.


이제는 그나마 여유가 생겼다. 학과에도 내가 개발한 과목이 몇 개 생겼고, 임용 초기에 절박한 마음에 개발한 신설 교양 과목도 여러 개가 되었다. 이젠 강의 시간이 넘칠까 걱정이지, 부족할까 걱정하진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학과 학생들에게 나는 전공수업과 교양 수업, 때론 타과 전공수업까지 같이하는 특이하고 바쁜 교수다. 강의평가가 좋은 편이라 수강신청 때마다 학생들은 몰리지만, 학생들이 찾아올 수 있는 번듯한 연구실은 있지만, 나는 여전히 불안한 경계에 서 있는 비정년트랙 교수다.


이제 곧 다음 학기 교과편성이 시작되고, 재임용 심사도 시작될 것이다. 그들은 또 어떻게 나를 밀어내려 할 것인가. 그리고 난 경계의 끝을 어떻게 붙잡고 서있어야 할까.


학교 밖이든, 학교 안이든, 불안정한 포지션의 박사 노동자에게 교수 사회는 여전히 정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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