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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박 Nov 11. 2019

신임 교수의 고백

나도 내가 뭘 가르치게 될지 모른다

https://www.bbc.com/news/business-47723950

교수로 막 임용된 사람이라면 누구든 첫 학기에는 대부분 정신없는 시간을 보낼 것이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수업 준비 때문이다. 비합리적인 교수 임용 시스템 덕분이다.


보통 신규 임용 교수의 임용은 개강 직전에 확정된다. 임용이 확정되어야 어떤 과목을 맡아서 수업을 하게 될지 결정되는데, 그게 확정되는 데까지 또 시간이 필요하다. 지원 전 다른 일을 하고 있었던 지원자라면 그 짧은 시간 안에 원래 하던 일을 정리하고, 필요하다면 이사까지 완료해야 하며, 또 필요하다면 자녀들의 학교나 돌보미 등을 새로 구해야 한다. 그 와중에 첫 학기의 수업 준비를 우아하게 미리 해놓을 시간 따위는 허락되지 않는다.


교수들이 자신의 주 전공과목만 수업하게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특히 나처럼 국내에 많지 않은 세부 전공으로 학위를 받은 경우, 자신이 논문을 주로 쓰는 분야로 강의를 맡게 될 거란 기대는 애초에 버려야 한다. 많은 경우 교수들은 스스로 새로운 것을 배워서 가르쳐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하지만 초년 교수에게는 스스로 배울 시간 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강의 시간이 많은 비정년트랙 교수일 경우 더욱 심각하다.


일반적으로 일반 정년트랙 교수는 1주일에 9학점(최소 3과목) 수업을 배정받는데, 비정년트랙은 유형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학교마다 상이하겠지만 보통 비정년트랙 전임교수의 유형은 연구 중점 교원, 산학협력중심 교원, 강의 중점 교원 - 이렇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C대학을 기준으로 간단히 설명한다면 연구 중점 교원은 말 그대로 논문을 많이 생산해내는 것이 중요하며, 강의는 한 학기에 6학점(최소 2과목)을 맡는다. 산학협력중심 교원은 학생들의 취업이나 학과 사업 수주, 외부 기관과의 협약 체결 등 대외활동에 주력해야 하며, 한 학기에 6학점(최소 2과목)의 강의를 맡는다. 그리고 강의 중점 교원은 이름 그대로 강의를 주력으로 해야 하는 포지션으로, 한 학기 책임강의 학점이 12학점이다(최소 4과목).


난 위의 세 유형 중 강의 중점 교원이고, 한 학기에 12학점의 수업을 해야 한다.


하지만 한 주에 맡아야 하는 강의 시간 총량은 맡은 과목의 유형에 따라 달라진다. 강의해야 하는 책임 시수가 12학점이더라도, 수업 방식에 따라서 강의 시간 자체는 12시간에서 최대 15-16시간으로 늘어날 수 있다. 일반적 이론 수업은 3시간 수업을 하고 3학점을 인정받지만, 이론과 실기가 혼합되어 있거나 실기 위주의 과목은 강의시간이 3-4시간이더라도 인정받는 학점은 2-3학점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실기나 혼합 과목이 끼어있을 경우, 수업하는 시간보다 적은 학점을 인정받게 된다.


자기 주도 학습, 경험 기반 학습 등 학생들이 무언가 스스로 하도록 하는 수업 방식이 트렌드인 요즘, 어떤 수업이든 이론 수업을 줄이고 실기 위주의 혼합 수업이 늘어가고 있다. 교수가 맡아야 하는 수업 시간은 계속 늘어나지만 그에 상응하는 시수를 채우기는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나의 임용 첫 학기는 어땠을까.


우선 학기 시작일 10일쯤 전에 임용이 확정된 덕에 내가 당장 맡을 수 있는 수업이 많지 않아서 총 4과목만 배정받았다(정말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중 실습과목이 대부분이어서 책임 시수를 다 채울 수 없었다. 또한 내가 소속된 학과에서 나에게 수업을 많이 내주지 않아 교양수업과 타과 수업을 함께 하게 되었다. 더불어 선임 교수들의 강의시간이 모두 결정된 후 빈자리를 찾아 들어가다 보니, 거의 모든 수업이 1교시로 배정되었다. 개인 연구실이 있을 뿐, 사실상 나의 삶은 시간강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가장 힘들었던 건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분야에 대한 강의가 4개 중 3개였다는 거다. 기본을 모르면서 학생들에게 특정 장르나 특정 영역에 대해 가르쳐야 하는 상황. 학기 초엔 거의 매일 책을 주문하고, 2시간짜리 수업을 준비하는 데에 책 2-3권을 번갈아 읽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가르쳐야 하는 내용을 나도 잘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조금 철학적이거나 비판적 분석을 요하는 내용들은 수업 내용에서 배제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 부분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내 입장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던 탓이다.


그 당시 나의 일상은 대략 이러했다.


오전 6시 반쯤 집을 나서서 7시에 학교에 도착. 샌드위치를 먹으며 강의 준비를 하고, 수업을 하고 돌아와서 다시 강의자료를 만들고, 밤 9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퇴근했다. 사실 더 오래 있고 싶었지만 아이를 봐주는 분의 퇴근시간이라 9시 반까지는 집에 가야만 했다. 저녁이나 점심 약속이라도 잡히는 날엔 강의자료 만들 시간 확보가 되지 않아 속으로 전전긍긍했었다. 다음 날 오후 수업의 강의자료를 전날 저녁에야 완성하는 날도 적지 않았다. 주말엔 육아에 매달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그나마 평일 새벽에 일찍 학교를 나와야만 강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아이는 점점 더 나를 찾았고, 분리불안 증세는 심해졌다.


먹는 것도 큰 문제였다. 중간에 나가서 먹고 들어올 시간도 아까워 거의 굶다시피 살았다. 나중엔 견과류나 초콜릿을 쌓아놓고 우유랑 같이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그때 날 가장 괴롭혔던 것은 어설픈 수업을 지속해나가야 하는 상황 자체였다.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수업을 이끌어간다는 것이 두려웠고,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어쩌나 싶어 늘 긴장상태였다. 특히 중간고사 기간 전에 진행된 수업에서는 강의자료  PPT가  거의 수업 전날에 겨우 완성되었다. 당연히 그다음 주 수업은 대략적 주제만 나와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으로 수업을 하게 될지는 정해져 있지 않았을 때가 많았다. 다음 시간에 뭘 가르칠지 모르는 교수가 진행하는 수업의 불안정성. 준비한 것 이외에 질문이 나올까 봐 두려워하는 교수. 첫 학기엔 매 수업시간마다 학생들의 눈보다 시계를 더 많이 쳐다봤던 것 같다. 빨리 끝나기를. 빨리 시간이 흐르기를.


몇 년이 흐른 지금. 난 여전히 강의 중점 교원이고, 수업은 많다.


지난 학기에는 1주일에 수업 시간만 20시간, 6과목 수업을 했고, 이번 학기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 17시간 강의에 5과목 수업을 하는 중이다. 매 수업 재밌게, 의미 있게 진행하고 싶어서 여전히 수업 준비 시간도 길다. 그래도 임용 첫 학기 때보단 꽤 여유가 생기긴 했다. 이런 글도 쓰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교수의 소임 중 가장 중요한 연구와 논문 생산을 할 시간은 여전히 부족하다. 대외 활동이나 봉사활동도 마찬가지다. 학기 중엔 다른 것을 할 여유가 거의 허락되지 않는다. 강의를 하는 시간과 강의를 준비하는 시간으로 일상의 대부분이 채워진다.


젊은 박사들이 학교에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강의 중점 교원으로 일해보는 것을 택하는 순간, 스스로를 엄격하게 다잡지 않으면 연구 실적이 멈춘 박사 노동자로 몇 년을 훌쩍 보내버리기 쉽다. 교수라는 직함이 주는 안일함과 학생들과의 만남이 주는 기쁨에 취해, 스스로를 냉정하게 돌아볼 시간을 잃게 되는 것이다. 젊은 학자들의 전투력을 상실하게 하는 이 시스템에 잡아 먹힐 것인지, 이걸 이용해 다른 곳으로 날아오를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하지만 어떤 쪽이든 치러야 할 대가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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