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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박 Nov 09. 2019

박사 노동자와 연구실


사진출처: http://www.thegeorgeanne.com/features/article_0080d014-4d43-5039-a667-4ad9c9d0fd90.html


집 근처 낡은 소호사무실을 연구실로 빌려 쓰던 시절, 나의 꿈은 개인 연구실을 하나 갖는 것이었다. 연구실이 갖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다정한 남편은 자기가 돈을 모아 연구실을 만들어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했었다.


"아니, 학교나 기업이 유지비용을 내주 연구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어쩌면 소박해 보이는, 하지만 모든 박사 노동자들이 꾸고 있는 꿈일 것이다. 개인 연구실이 있다는 것은 적어도 한 기관에서 안정적인 자리를 잡았다는 뜻일 테니 말이다.


실제로 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에게 개인 연구실은 자부심이자 명예를 상징하는, 교수 임용 전쟁에서 승리한 자들만 쟁취할 수 있는 일종의 전유물로 인식되는 것 같다.


교수들 간에 어떤 교수가 방을 어떻게 꾸몄다더라 하는 것은 늘 이야깃거리다. 각자 나름의 스타일로 자신의 공간을 꾸밀 수 있다는 것은 교수라는 직업이 주는 몇 안 되는 재미임은 분명하다.


교수 연구실은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공적 명예를 상징하는, 무척 특이한 공간이다. 문 앞의 명패는 공적 자아를 드러내지만,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는 직접 들여다보기 전엔 알 수 없다. 특별히 친하지 않다면 동료 교수의 연구실에 들어가 볼 일도 없다. 난 아직도 내 바로 옆 방을 쓰는 법학과 교수의 연구실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많은 대학들은 공간 부족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때문에 비정년트랙의 교수들에게는 다인 1실을 내어주는 것이 보통이다. 2인 1실은 그나마 나은 수준이지만, 4-5인의 교수가 하나의 연구실을 쪼개 쓰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상황은 학계의 생리를 모르는 이들에게 다소 생소할 이다. 혼자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의 크기가 곧 권위의 크기가 되는 영역이다.


경하는 은사님이 평생을 비정년트랙 교수 생활을 해오고 계신다는 사실을, 난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어떤 교수가 정년 교수인지, 비정년 교수인지는 학생이나 외부인의 입장에서 정확히 알기 어렵다)  가끔 찾아뵐 때마다 교수님은 자신의 연구실이 아닌 학교 앞 페에서 만나자고 하셨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의 연구실은 2인 1실이었다. 연구실로 찾아뵙겠다는 인사를 할 때 그가 느꼈을 마음을 이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교수님에게는 자신만의 연구실을 갖는 것이 은퇴 전에 이루고픈 여전한 꿈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꿈이 갑자기 이루어져 버렸다.


관대하게도, C 대학은 비정년교수들에게도 개인 연구실을 배정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에 공간이 충분해서인지, 비정년교수의 인권을 고려해서인지... 구체적인 이유까진 알 수가 없다.


그 후로 5년, 또다시 비정년 재임용 심사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강의를 하러 방을 나설 때, 연구실로 복귀할 때. 가만히 가만히, 연구실 문 앞에 달린 내 이름이 인쇄된 명패를 쳐다보고 서있을 때가 있다. 내년에도 내 이름이 저기에 붙어 있을까. 이곳에서의 시간은 언제까지일까.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 공간은 온전한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일까. 여전히 내 방의 집기는 학교에서 내어주는 책상 하나, 책장 둘이 전부다. 무언가 채우면 이곳을 떠나는 날 너무 슬퍼질 것 같아서, 아직 그 무엇도 채워놓지 못했다.


어제 오후, 입대 휴학을 학생인사를 하러 찾아왔다.


"교수님, 다녀와서 뵈어요!"


환하게 웃는 남학생의 머리 위로 보이는 빛바랜 수영장 색깔의 블라인드를 가만히 쳐다보며 잠시 생각한다.


진짜 내 방이 되면, 저 블라인드부터 바꿔야지. 네가 돌아오기 전에 바꿀 수 있을까. 아니, 그때까지 내가 여기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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