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에 쓰는 안경' 보청기의 오류... 필담과 몸짓, 부자 대화법
성탄절 다음 날인 어제 경로당에 가신 아버지가 평소 귀가하는 시간보다 이른 12시쯤 오셨다. 왜 이리 점심을 빨리 드셨나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버지 표정도 어두웠다.
아버지는 매일 경로당에 가신다. 거기서 회원들과 소일과 대화를 나누고, 경로당에서 주는 점심을 먹은 후 오후 2시쯤 집에 오신다.
이날 여느 때와 같이 오전 11시 즈음 경로당에 갔는데, 예전과 달리 아무도 없고 식사도 못했다면서 옆 놀이터에서 잠시 운동만 하고 왔다는 것이다.
사정을 알아보니 이랬다. 경로당에서는 성탄절 전날 점심때 올해 중식 제공은 이날로 끝났다는 내용을 공지했는데, 아버지만 이를 모르고 어제 경로당에 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내용을 전혀 듣지 못했다는 입장이다. 만약 인지했다면 경로당에 헛걸음하지 않았을 거란 것이다. 결국 이 사단은 아마도 요즘 아버지 청력이 떨어져 생긴 것으로 짐작됐다.
당황하고 황당했던 아버지는 "나 자신이 바보 같다"며 자책을 하셨다. 당신 귀가 잘 안 들리기에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행동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에 아들인 나도 "행사와 일정이 취소되거나 변경됐는데 이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약속 장소에 간 경우가 더러 있다"며 아버지 실수를 위로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버지께서는 귀가 갑자기 잘 안 들리면 목소리가 커지고 동문서답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다소 불안하고 초조한 증세를 보이신다.
다소 격앙돼 있던 아버지는 내 말에 상기된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았다. 그리고 조금 후 나는 아버지 점심을 차려드렸다.
▲황당했던 아버지는 당신 귀가 잘 안 들리기에 그랬다며, "나 자신이 바보 같다"며 자책을 하셨다.(자료사진). ⓒ mark0polo on Unsplash관련사진보기
이 상황의 발단은 지난 월요일 23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날 아침 아버지는 나에게 보청기 왼쪽이 충전이 안 돼 고장 난 것 같다고 말했다. 어쩐지 아버지는 TV 소리도 잘 안 들린다고 호소했다.
실제 보청기를 충전기에 꽂았지만 원래 들어오던 파란 전원이 켜지지 않었다. 양쪽 귀 모두에 보청기를 끼는 아버지는 한쪽 보청기를 쓰지 않으면 청력은 거의 제로다. 하나만으로는 듣는 감각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이럴 땐 아버지와 대화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소리도 명확히 들을 수 없어 아버지는 멍한 상태다. 청력이 소실되면 말수가 줄고 표정도 어눌해지는 법이다.
이날 이후 아버지는 침울해졌다. 귀가 닫히며 세상과 멀어진 것이다. 귀와 청력이 살면서 지켜야 할 최후 감각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같은 아버지 애로를 잘 알기에 이비인후과 상당실에 바로 연락해 사정을 이야기하고 수리를 부탁했지만, 27일에야 가능하다는 답을 들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만 4일 동안 세상과 단절한 채 지내야 한다.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수리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보청기가 고장 난 후 하루 만에 아버지는 경로당에서 공지한 중식제공 종결 소식을 놓치고 만 것이다.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라 애당초 그 정보를 듣지 못하신 것으로 보인다.
보청기가 없을 때 대화법
▲보청기 충전기 ⓒ 이혁진관련사진보기
보청기를 고칠 때까지 우리 부자(父子)는 필담, 즉 글로 써서 대화하기로 했다. 우리 둘만이 소통 가능한 몸짓언어(바디랭귀지)도 동원했다.
하지만 필담과 몸짓언어에도 한계는 있다. 아버지가 내 말과 의도를 이해하더라도 그 반응을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고 말보다 시선이나 행동을 헤아리는 게 중요하다.
무엇보다 아버지처럼 청력이 소실된 사람들과 대화할 때 인지 유무를 재차 확인해야 한다. 상대 제스처만으로, 대화 내용을 다 인지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아버지 청력 소실은 외부소리를 전기신호를 바꾸어 뇌로 전달하는 달팽이관 세포가 노화돼 감소하거나 손상돼 생긴 것이다. 이럴 때 보청기 외에 특별한 대안이 없다. 그렇다고 청각을 완전히 회복하는 것도 아니다.
보청기를 끼더라도, 다만 여러 사람이 동시에 대화하거나 시끄러운 환경에서는 거의 전혀 듣지 못한다. 보청기는 잡음을 걸러내는 능력도 거의 없다. 통상 여성들의 고주파 소리는 잘 들릴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흔히들 보청기를 '귀에 쓰는 안경'에 비유한다. 치매유발 요인으로 시력보다 청력소실이 먼저 언급되고 있기도 하다. 이비인후과 전문의는 아버지의 인지 오류는 보청기 사용자들에게 늘 있을 수 있다며 이런 경우 주변 사람들의 이해와 관심이 필요하다고 한다.
드디어 오늘, 이 모든 문제의 발단이 된 보청기와 충전기를 수리하고 양쪽 귀에 착용하니 아버지의 표정이 되살아났다. 세상과 소통이 가능해진 것이다.
다시 환해진 아버지 얼굴을 보며 나도 기뻤다. 또한 당연한 것이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아직 보청기를 끼지 않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건강하고 행복한 상태라는 것을 새삼 느낀 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