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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듬 Oct 24. 2024

다박다박의 취미 생활

베짱이가 되고 싶은 개미

퇴근 후 저녁 시간이다. 개미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다짐을 꾹꾹 한다.

"선생님, 직장에서 엄청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었어요. 오늘은 교본 말고 마음이 풀리는 곡, 신나는 곡 하고 싶네요."

퇴근하면 가만만 내려놓고 쇼파에 눕곤 한다. 개미도 아니고 겨울잠 자는 달팽이가 된 듯말이다. 잘 보는 부지런한 베짱이가 되려고 플루트 레슨을 등륵했다. 레슨의 주요 교재는 교본, 교본을 연습하는 일이 참으로 지루하다.


기분 핑계를 대며 재미있는 곡을 알려달라고 하니, 레슨 선생님은 '라 캄파넬라 La Campanella'를 펼친다. 고음부의 아름다운 음색 속 청아한 종소리가 아주 빠른 템포로 울려 퍼지는 연주, 바이올린 소리로 익숙한 '라 캄파넬라'를 플루트로 연습 시작이다.

1옥타브 미에서 2옥타브 미까지 한 호흡으로 자연스럽게 끌어올리는 연습부터 해야겠다. 맑은 종소리, 가벼우면서도 깔끔한 고음 처리, 레슨 첫날, 플루트 소리는 음악이 아니었다.

개미 근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곡을 받아드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없다. '아, 이 곡!'하며 사람들이 보여줄 반응을 떠올리며 연습에 연습을 계획한다. 2옥타브 고음 음역대가 찌르듯 창창하게 펼쳐지는 이 곡을 집에서 연습한다는 건, 동거인은 물론 이웃도 참 괴로운 일이다.


동네 악기 연습실을 찾았다. 예약을 한다. 예약 확인 메시지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시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답도 얻지 못한다. 연습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 그냥 막 지나가고 있다. 참을 수 없다. 환한 낮이므로 결국 집에서 해 보기로 한다. 가장 작은 방으로 향한다. 소리가 그 방안에서만 갇혀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연습한다. 첫 부분을 부드럽게 전개하고 이후 빠른 손놀림이 필요한 구간을 반복적으로 연습해 본다. 땀이 흐른다. 습하고 찌는 듯한 공기가 방을 채운다. 가만히 있으면 이 열기에 익어버릴 것만 같아서 발코니 문을 조금 연다. 작은 방의 공간이 발코니만큼 확장됐으니 소리가 차지하는 공간도, 연주자의 온기도 조금 커졌다. 연습의 정도에 만족하며 한숨 돌린다. 한 음, 한 음을 성의있게 내며 느낌 충만하면서도 빠른 템포를 살린다. 문 닫은 방안은 에어컨 공기가 닿지 않는다. 성의 있는 연습을 하면 할수록 온몸이 열기로 휩싸인다. 후끈거리는 기운이 식어야 또 만족할 만한 연주를 할 수 있으니 한숨 쉬어간다.


그때 기묘하지만 익숙한 소리가 들린다. 매우 낯익으면서도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소리다. 저층 집에서 살 적에 거실에서 책을 보고 있노라면 이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에 모든 걸 중단하고 소리 제거에 여념없을 때도 있었다. 소리가 나는 곳, 발코니 문 열린 공간으로 나가본다. 그렇다. 예상대로이다. "야, 야!" 플루트 소리보다 더 고음이며 힘찬 소리를 내지른다. "너 가!" 마치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존재를 상대하듯이 의미를 담아서 짧게 말을 내뱉는다. 알아들었는지 사라졌다. 한숨 돌린다. 나 흥분은 했지만 진정하고 다시 플루트 연습에 집중해야 할 텐데 하는 염려가 있었다. 손에 잠시 들었던 악기를 내려놓고 다시 발코니 창쪽으로 향한다. 에어컨 실외기가 있는 공간이다. 좀전보다 고개를 숙여 실외기와 벽 사이를 보니 불운하게도 근심이 옳았다. 꿈틀하는 꽁지가 보인다. 아까 말을 건넨 녀석과는 다른 존재다. 다시 나는 고음과 괴성의 거친 소리를 낸다. 아까 녀석과는 다르다. 어머니의 마음으로 그곳에 있는 그 존재는 좀처럼 떠날 줄을 모른다. 그 마음을 아는지라 그대로 두고 싶지만 그냥 둘 수 없기에 나는 괴이한 소리를 여념없이 내지른다. 근사한 베짱이가 되고 싶은 개미는, 개미도 베짱이도 포기하고 이상한 소리만 내고 만다. 다시는 그 공간에서 플루트를 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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