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원한 여름. 내 유일한 행운.

박티피_깡통 속의 금화

by 고필찬



모든 글쟁이들에겐 글쓰기 징크스란 게 한 두 개쯤은 있기 마련이다. 내 징크스는 제목과 연관돼 있다. 제목을 안 (또는 못) 짓고 첫 문장을 뗀 글은 집필 기간 동안 필요 이상의 애를 먹더라.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그리하여 내게 제목은 마스트, 즉 돛대 역할을 함을 알게 됐다. -꿈보다 해몽이려니 싶지만 어쨌든- 선체의 구심점이 되어 기동성을 좌지우지하는 추진 수단이자 나아갈 방향을 잡아주는 돛을 달게 하는 장치.


애석하게도 지금 붙들고 있는 글이 바로 돛대 없이 망망대해에 내팽개쳐진 범선이다. 마땅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 전전긍긍하더니, 기어이 의지와 매 순간 조난의 위기처럼 휘청댄다. 죽겠다 아주.


오늘 리뷰할 <깡통 속 금화> 이 위기 속에 선물, 그러니까 구조선처럼 나타난 글이다.


BL 소설을 읽을 땐 유독 직관적인 제목에 마음이 가는 편이다. 반대로 조금의 내용 짐작도 되지 않는 글엔 시도를 꺼린다. 엄밀히 말하면 <깡통 속 금화>는 후자에 가까웠다. 그런데 왜 읽었냐고?

… 우리는 이런 걸 보통 운명이라고 부르잖아요.






줄거리




나 같은 거, 묻히지 마, 네 인생에.



대학 시절의 첫사랑, 주인수 ‘손지한’을 잊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주인공 ‘주해인’. 이직에 성공한 해인은 어느 날, 막 ‘육아 휴직’에서 복귀한 선임이 그때 그 손지한임을 알게 된다. 뭐 이런 얄궂은 인연이 다 있나, 하고 얼떨떨함도 잠시였다. 해인은 결혼도 했겠다, 저와 달리 그때 그 시절을 다 잊고 사는 줄 알았던 지한 또한 자신에게 흔들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해인은 대학 시절 일명 ’포카리남‘이라 불리던 지한에게 첫눈에 반한다. 각고의 노력 끝에 해인은 지한과 친해지게 된다. 지한 역시 역시 다정하고 밝은 해인에게 조금씩 애정을 갖게 된다.


한편, 소위 금수저로서 매사에 여유가 넘치는 해인과 달리 지한은 과외와 아르바이트로 빠듯하고 빡빡한 삶을 사는 고학생이다. 지한은 가난에 물든 자신의 그늘이 어떤 식으로든 해인에게 드리울까, 지레 겁먹는다. 두려움과 맞물린 시간 속에서 쌓여가는 현실의 가혹한 무게들. 결국 지한은 해인을 떠난다. 안녕, 이라는 말도 없이.


이제야, 내 마음이 잔다.



오랜 시간 동안 실연의 아픔에서 빚은 지독한 우울증을 앓아온 해인, 가난과 싸우며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까지 외롭게 만든 지한. 둘은 마침내 서로의 변함없는, 아니 잊힌 적 없는 시간 속에서 더욱 깊어진 진심을 깨달으며 비로소 하나가 된다.



감상



지한은 가진 것이 없어 채워 넣기 바쁜 제 가난한 삶을 텅 빈 고철 깡통에 빗댔다. 해인은 그 깡통 속에 들어온 금화다. 너무 반짝이고 너무 커다래서 품을 수 없는 존재, 이런 제 삶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 그때 그 시절, 주해인은 손지한에게 감히 엄두도 못 낼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해인은 지한과 사랑의 결실을 맺고 나서야 비류소 자신이 진짜 ‘금화’가 되었노라 말한다. ‘손지한이 아니면 주해인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해인의 반듯하고도 애절한 순정 때문에 마지막엔 아주 펑펑 울었다.


존재만으로 전부를 의미한다는 애정 앞에, 앞다투어 자신을 깡통으로 그리고 상대를 금화라고 지칭하는 소설. 삶에 지쳐 공허해진 내 가슴에 길고 거대한 감동을 채워준 이 소설은 정말로 <깡통 속 금화>다.






모름지기 꿈은 크게 가지랬다. 물론 (n년째) 일천하기 그지없는 내가 박티피처럼 비단결 같은 이야기를 구사할 수 있을진 모르겠다.


그래도 한 길만 보고 살다 보면 가능하지 않을까?

이십 줄 내내 손지한만 보고 살아가던 주해인이 이제야 잠을 자게 된 것처럼.


작년 여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깡통 속 금화> 제목조차 짓지 못해 그 어느 때보다 큰 에너지를 소비하던 중 발견한 글이었다.

비록 ‘이렇게 기깔나는 제목을 져야 글이 팔린다 ‘라는 뼈아픈 숙제를 얻긴 했지만 반대로 ‘이렇게 재미와 감동이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의지도 채워줬으니 실보다 득이 넘치는 알찬 독서였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끝으로 존재 자체만으로 꾸중을 놓는 내 인생의 위인 사람들의 위인 목록에 박티피 작가를 추가하며 리뷰를 마친다.


박티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