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바스크 지역은 나의 버킷 리스트다. 분리주의 수준으로 로컬이 강한 지역을 좋아하는 나에게, 바스크만큼 강력한 모델을 찾기란 쉽지 않다.
바스크의 로컬 파워는 말로만 그치지 않는다. 이 작은 지역이 배출한 성과를 보라. 빌바오의 다국적 금융그룹 BBVA, 도시재생의 전설이 된 구겐하임 미술관, 그리고 아라사테의 세계 최대 협동조합 기업 몬드라곤까지. 우리는 보통 이런 글로벌 기업들을 로컬 문화와 연결해 생각하지 않지만, 바스크에서는 다르다. 여기서는 지역 정체성이 곧 경쟁력이다.
하지만 세계적 기업을 배출한 것만으로 바스크 정체성을 충분히 표현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독특한 지역을 관통하는 더 강렬한 언어는 없을까? 그래서 찾은 표현이 '작은 스위스, 바스크'다.
8월 바스크 여행을 앞두고 이 지역을 이해하기 위해 책과 영화를 찾던 중, 넷플릭스에서 흥미로운 작품을 발견했다. 2017년 스페인 영화 『인비저블 가디언(The Invisible Guardian)』이다. 바스크 산악 지역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가 바스크와 스위스를 직접 연결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영화는 돌로레스 레돈도의 '바스탄 3부작' 소설을 영화화한 첫 번째 작품으로, 표면적으로는 연쇄살인을 다룬 스릴러다. 바스크 지역 출신 경찰 아마이아 살라사르가 고향으로 돌아와 젊은 여성들의 연쇄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을 그린다.
하지만 이 사건의 본질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다. 범인은 바스크 지역의 전통적 순수성이 현대 문명에 의해 더럽혀지고 있다고 믿으며, 연쇄살인을 통해 바스크의 영혼을 '정화'하려 한다. 범인을 찾지 못한 마을 사람들은 이를 바사자운(숲의 수호자) 신화 속 존재의 소행이라고 여기기 시작한다.
영화의 주 무대인 바스크 지역은 총인구 약 300만 명의 작은 지역으로, 스페인 북부와 프랑스 남서부에 걸쳐 있다. 이 지역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 중 하나인 바스크족의 터전으로, 로마 제국 이전부터 독특한 언어와 문화를 유지해 왔다. 중세 시대에는 나바레 왕국으로 독립국가를 이루었으며, 근현대에 와서도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독재 시대를 거치며 문화적 탄압을 받았지만 끝내 자신들의 자치와 정체성을 지켜냈다.
바스크 지역은 각기 다른 특색을 가진 여러 지역으로 나뉜다. 빌바오가 있는 비스카이아 주는 전통적인 철강업과 조선업의 중심지이자 현대적 문화의 허브다.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유명한 빌바오는 산업 도시에서 문화 도시로 성공적으로 탈바꿈한 대표 사례다. 반면 산 세바스티안(도노스티아)이 있는 기푸스코아 주는 미식과 해변 문화로 유명하며, 칸 영화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산 세바스티안 국제영화제의 개최지이기도 하다.
나바라 주는 바스크 문화권의 일부이지만, 지역 내에서도 바스크 정체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곳이다. 특히 북부 산악지역인 바스탄 계곡은 인구 수천 명에 불과하지만 바스크 전통문화가 가장 순수하게 보존된 지역이다. 이곳은 목축업과 전통 건축, 그리고 고대 신화가 일상에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또한 바스탄 계곡은 유럽 3대 성지순례길 중 하나인 산티아고 순례길의 중요한 경유지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순례자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에 첫발을 내딛는 곳이 바로 바스탄 계곡의 론세스바예스 마을로, 천 년 넘게 순례자들을 맞이해 온 역사 깊은 땅이다.
영화 속 나바라 지역은 몇 가지 키워드로 요약된다. 피레네 산맥의 목동이 양 떼를 몰고 다니는 목축 문화, 너도밤나무 숲에서 나온 목재로 지은 전통 가옥들, 계곡을 따라 흐르는 개울과 강들이 만드는 자연의 선율.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풍경을 감싸는 끝없는 비와 안개가 있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이 피레네 산맥에 부딪혀 만들어내는 이 기후는 바스크 지역 특유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여기에 가톨릭 전통과 바사자운 같은 고대 신화가 공존하는 종교적 다층성, 알프스 마을을 연상시키는 돌과 목재의 건축물이 더해진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키워드로 수렴된다: 영혼의 순수함. 급격한 현대화 속에서도 정체성을 지켜온 바스크 사람들의 문화적 자립성과 내면의 힘이다.
바스탄 계곡의 일상은 세대를 거쳐 이어져 온 전통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영화의 핵심 무대인 몬레카세로 사라자르(Monlecasero Salazar)는 바스크 전통 제과점으로,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찬치고리(txantxigorri)라는 전통 빵은 단순한 음식을 넘어 바스크 정체성의 상징이다. 찬치고리는 바스크어로 '작은 빨간 새'라는 뜻으로, 달콤한 맛과 특유의 모양으로 바스크 사람들의 일상과 축제에 빠질 수 없는 존재다.
영화에서 이 전통 빵이 중요한 스토리의 열쇠가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몇 세대에 걸쳐 전해 내려온 제조법, 가족의 비밀 레시피, 그리고 이를 둘러싼 사람들의 관계는 바스크 공동체의 깊은 유대감과 전통을 지키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바스탄의 일상은 작은 것 하나하나가 모두 바스크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다.
영화를 보면서 계속 바스크를 스위스와 비교하게 되었다. 자연환경 측면에서 바스크는 피레네 산맥, 스위스는 알프스 산맥의 영향을 받는 고산지대로, 두 지역 모두 깊은 계곡과 목초지, 변화무쌍한 날씨를 공유한다. 역사적으로도 두 지역은 큰 제국들 사이에서 독특한 자치권을 유지해 왔다. 바스크의 푸에로스(지역특별법)와 스위스의 칸톤 제도는 모두 중앙집권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된 자치의 산물이다.
사회적으로는 공동체 중심의 문화가 강하다. 목축업과 농업을 기반으로 한 전통적 생활방식이 여전히 문화적 자산으로 존중받고 있으며, 종교적 전통과 고대 신화가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무엇보다 외부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길을 걸어온 독립정신이 두 지역의 문화적 핵심이다. 스위스가 영세 중립국을 선언하며 독립성을 지켜온 것처럼, 바스크 지역도 독립을 위한 오랜 투쟁을 통해 자치와 독립의 가치를 일관되게 추구해 왔다. 이러한 정신적 독립성이야말로 두 지역의 강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원천이다.
바스크 지역의 독립정신은 단순한 지역 특색을 넘어서, 전 지구적 균질화에 저항하는 문화적 주권의 표현이다. 바스크어(에우스케라)라는 고유 언어, 펠로타 같은 전통 스포츠, 독특한 건축양식은 모두 이 지역만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바스크 정체성은 지역 산업을 육성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지역은 현재 스페인에서 가장 산업이 발달하고 소득이 높은 지역 중 하나로, 정밀 기계, 철강업, 조선업 등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자치권에 기반한 독립적 경제 정책과 교육 시스템이 이러한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산업 구성과 사회 시스템 측면에서도 바스크와 스위스는 많은 유사성을 보인다.
『인비저블 가디언』은 로컬의 힘이 현대 세계에서도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 속 바사자운 신화는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자연과 공동체를 지키려는 바스크 사람들의 의지를 상징화한 것이다. 동시에 영화는 전통을 지키려는 의지가 극단으로 흐를 때의 위험도 경고한다. 진정한 전통의 계승은 배타적 고립이 아니라, 조화와 균형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작은 스위스, 바스크. 그 이름 자체가 이미 이 지역의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말해준다. 크지 않지만 단단하고, 화려하지 않지만 깊이 있으며, 세계적이지는 않지만 보편적 가치를 간직한 곳. 『인비저블 가디언』은 바로 그런 바스크의 모습을 스크린에 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