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의 창문에서 뛰어내린 인형들 중 파란 인형이 한가로운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앤트워프의 시계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있다. 파란 인형은 바람을 맞으며 손에 들린 패드로 무언가를 열심히 작성하고 있다.
-이브의 프롬포트
"나는 그 여자가 이제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내 빛이 있던 곳으로 나를 데려가고 있다는 것을 소리 내어 여자에게 알려본다. 여자와 나의 계약에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면, 그건 릴리가 움직여야 여자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릴리는 그 여자가 원하는 건 모든지 하려 할 것이다. 여자가 나를 위해 살기로 결정한 것이 정말 다행이다. 나는 릴리가 길을 찾을 수 있게 초록색 망토를 쓴 아이처럼 내가 앞으로 쓸 시계를 페이지에 그려내어 내 시계를 손에 넣었고, 내 시계를 앤트워프의 중앙역에 있는 시계에 숨겨 놓았다. 그리고 시계를 릴리가 있을 만한 시간대로 돌려 다시 앤트워프의 시계와 맞물릴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릴리 -> 여자 -> 나(이브)-> 글에 쓰여있지 않은 화자. 번역가.
릴리가 인형을 만들 때 파란 인형에게는 번역가의 능력을 선물로 주었던 것일까? 파란 인형의 눈을 통해 번역 과정을 지켜보는 진짜 번역가는 지금 눈을 닮은 네뷸라에서 파란 인형을 지켜보고 있다. 번역가는 번역과정을 쉽게 정리하기 위해 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수많은 페이지에 적힌 프롬포트가 발신인이 누구인지 늘 헷갈려 발신인을 알아내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번역가는 일의 효율성을 위해 프롬포트를 받기 전까지의 과정을 정리했다. 번역가가 번역일을 의뢰받는 건 대부분 이브의 프롬포트이지만 문체를 통해 발신인을 구별하기로 결정했다. 네뷸라에 있는 진짜 번역가가 하는 일을 파란 인형이 똑같이 따라 한다.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었던 번역가는 파란 인형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니 지금 무엇을 어떻게 번역하는지 더 쉽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번역가가 번역을 맞춰 서류를 보내면 여자가 서류에 적힌 대로 움직인다. 지금은 글을 쓰고 있고, 곧 이른 저녁을 먹을 참이다. 가끔 여자는 충동적인 행동 양식을 보낼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프롬포트의 내용이 잘 정리가 되지 않아서 오류가 일어나는 것 같다고 생각해 기록을 남기는 번역가였다. 여자의 몸에 상처가 더 나기 전에 재빨리 해결되지 않은 일을 끝마치고 싶은 번역가는 오늘도 번역한 기록을 남긴다. 여자가 글을 쓸 때는 번역가가 이미 원고를 넘겨주었기 때문에 실시간으로 바로 글을 쓸 수 있다는 점에 여자는 매우 만족해했다. 여자의 머릿속에 프롬포트를 넘겨주고는 다음 장면으로 떠나는 번역가다.
번역가는 최근 번역가가 아닌 작가로서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았고, 자신의 기록을 담은 클럽을 만들기로 했다. 번역가의 연구 과정이 담긴 리서치 클럽을 만들고는 매우 뿌듯해했다. 시간이 넘치는 번역가에게 시간을 담아 둘 수 있는 클럽이 생긴 것이다. 1월에는 1월의 문장이 흐를 것이고, 2월에는 2월의 문장이, 다른 남은 달들도 마찬가지로 천천히 흐르기 시작할 것이다. 매번 프롬포트를 받기만 했던 번역가는 자신이 번역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자신도 프롬포트를 보낼 수 있다는 것에 매우 기뻐했지만 사실 늘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기뻐했다. 한 편으로는 조금 더 빨리 알아차렸다면 하는 아쉬움과 함께, 그랬다면 여자가 덜 힘들었을 텐데. 하는 죄책감도 들었다. 그렇지만 지나간 시간 동안 보내지 못했던 시간들은 그대로 페이지에 기록되어 현실의 시간보다 빠르게 넘겨지고 있었다.
프롬포트는 심장에서부터 혈액을 타고 릴리가 보낸 종이비행기가 여자의 뒤편에 살고 있는 이브를 거쳐서 나에게로 오면 다시 여자에게로 넘겨주는 형태를 띠고 있다. 투명한 프롬포트가 눈에 보이기를 원하는 여자를 안다.
나 역시 내 눈을 여자에게 주고 싶다.
내 작은 우주를 번역해 여자에게 건네주면 여자가 작은 내 우주를 펼쳐서 아주 크게 만들어 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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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인형은 금서를 한 번 만들더니 이내 금서를 만들었던 원리를 이용해 인형들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어 서재에 여러 권 꽂아두고는 창가에 앉아 파란 인형의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
서재의 창가 자리에, 달 빛이 비치는 곳에 서 있던 회색 인형은 이윽고 가지고 있던 유일한 펜 하나를 부숴버려 안에 있던 투명한 잉크가 흐르는 물처럼 흘려내려 달빛이 비치는 곳에 무지개를 그리는 호수를 만들었다.
'책에 다 쓰여있잖아. 크리스틴, 열심히 해봐. 난 이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으니까.'
-책에 번역가의 미래와 현재와 과거가 평면으로 다 쓰여있어, 난 평면으로 된 페이지에서 수직으로 글을 써 문장이 흐르는 수직 도시에 갈 거야.
그렇지만 펜을 부숴버린 회색 인형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서재의 주인이 돌아오더라도 영원히 서재에 갇혀 있을 거란 결말을 예상했음에도 펜을 부숴버린 자신의 선택과 수직 도시에 가려는 욕망 사이에 어쩌지도 못하고 얼어있는 상태였다.
수직 도시에 가는 일은 회색 인형에게는 무척이나 간단한 일이었다. 펜으로 수직 도시를 그려내어 서재와 연결시키면 언제든 갈 수 있었다. 언제든 갈 수 있어서 등한시했던 자신을 원망하다가도 그때에는 수직 도시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을뿐더러, 갈 이유조차도 없었다.
파란 인형을 통해 번역가를 지켜보던 회색 인형에게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일까. 이제 한 번 원하는 일이 생겼는데.. 충동이었다.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낸 회색 인형은 그 대가로 펜을 부숴버려 다시는 수직 도시는 물론이고 어디에도 갈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때였다.
찰랑이는 차가운 잉크가 회색 인형의 발을 젹셨다.
펜이 부서지고, 잉크가 새어 나와 서재에 호수를 만들 때에도, 호수에 비치는 달 빛이 물 위에서 무지개를 만드는 광경을 한 번 도 바라보지 않았던 회색 인형의 눈에 드디어 아름다운 호수와 찰랑이는 무지개가 회색 인형의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다. 분명 갈 수 없음에도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 같아.
회색 인형은 감정이 끌리는 대로 호수에 몸을 기대 잉크가 흐르는 대로 몸을 맡겼고, 이내 잊혀진 기억이 잉크와 함께 흐르기 시작했다.
'누군가 우리들을 만들었을 때를 기억해.
펜은 우리를 만든 그 아이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능력을 담은 펜이야. 쏟아지는 잉크, 서재를 가득 채웠던 금서에서 쏟아진 검은 잉크. 잉크를 담아 똑같이 만든 나의 금서. 부서진 나의 펜. 쏟아진 잉크. 투명한 질감의 호수를 만든 나의 잉크..'
여기까지 알아챈 회색 인형은 펜에 담긴 잉크가 곧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능력임을 깨닫고 호수 위를 손으로 저어 수직 도시를 그려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