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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케 Sep 14. 2024

릴리의 정원

챕터 9. 눈동자 속의 편집부

번역가의 시간이 아주 긴 한 장의 페이지처럼 펼쳐져 보이기 시작했고 회색 인형은 페이지를 접어 책처럼 만들고 여러권으로 나누어 번역가의 시간들이 기록되어 있는 이 책들을 수직 도시에 한 권 한 권 꽂아 넣기 시작했다. 책들의 분류를 끝마친 회색 인형은 가장 먼저 꿈에서 보았던 번역가의 이전의 기록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노출 콘크리트로 디자인된 건물과 고동색 목재 책장이 있는 곳의 기록이었다.


빨간색 지갑이 침대 옆, 창문아래에 놓여 있는 목재로 된 책장 위에 올려져 있는 이탈리아의 어느 집과 교차되는 장면의 기록이었다.


번역가는 여전히 한 카페에서 밤이 될 때까지 눈동자 속에 비치는 모든 장면을 눈 속에 기록해 두었고 어느 남자가 눈에 비추기 시작했다. 번역가는 이를 영화 시나리오에 적기 시작했고 남자가 맡은 역할은 유령의 연인인 이탈리아의 작곡가였다.


-번역가의 시나리오


거울 앞에서 보이지 않는 유령의 뒤 편에 서서 오른쪽 팔을 잡은 채 목을 조르면서 유령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는 숨결을 맡았다. 유령의 형체가 물속에 빠져있는 남자를 구하면서 큰 흐름으로 보이고, 남자는 유령에게 쫓기면서도 잠에서 깨면 늘 유령을 찾았고, 남자의 눈앞에 유령의 잉크가 보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잉크를 펜으로 끌고 와 악보를 적기 시작했고 악보가 완성되자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선율이 들리지만 남자는 슬픈 표정을 짓고 눈물을 흘린다. 유령의 존재를 알고 있는 남자는 절대 만날 수 없는 유령을 이제 그만 떠나보내려고 한다.


남자가 연주하는 선율에 잉크가 달라붙어 어느 장교의 집무실에 까지 흐르며 잉크는 집무실 서재의 한 책에 안착했다. 장교가 창문으로 빨간색의 깃발이 흔들리는 걸 바라보는 것을 왼쪽에서 잡던 카메라가 장교를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가면서 깃발이 파란색으로 변한다. 장교가 입고 있는 제복 역시 깃발의 색상이 달라지자 같이 달라졌고 서재에서 책 한 권이 떨어지자 뒤돌아 보는 장교는 살짝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 유령의 존재를 눈치챈다.


유령의 머릿결이 흩날린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화면에 크게 잡히면서 머릿결을 훑고 지나가는 이브가 보인다.


이브는 장교와 눈을 마주치지만 장교는 이브를 볼 수 없다. 그저 느낄 뿐. 이브가 떨어진 책을 든다.


'내가  편에 선건 가 좋아서가 아니야. 너를 죽이려는 자들과 목적이 같아서지. 잘해봐, 나의 왕, 난 너에게 다 걸었어, 내 체스판의 왕의 말이 되어 날 위해 움직여봐. 날 즐겁게 해 줘. 기대할게. 내가 교황을 대신하려 해. 프랑스의 스파이, 이탈리아의 마피아, 임무는 하나야. 내 인형들아 움직여. 내가 가진 패를 봐, 나를 이길 수 있겠어?'



유독 화창한 로마의 신전 앞 소크라테스. 기둥에 새겨지는 신탁을 목격하다.


이브는 책에 자신의 대사를 적어 넣고는 다시 집무실의 바닥에 내던지고는 집무실의 탁자 위에 있던 빨간 지갑을 눈여겨보다가 이내 사라진다. 화면은 빨간 지갑을 잡는다. 이내 빨간 지갑은 그대로지만 장교의 집무실이 아닌 고동색의 책장이 나오고 그 앞에서 책 한 권을 골라 기대감에 부푼 듯이 뛰어가는 한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여자는 고른 책을 펼쳐 한 페이지를 읽어 내려간다.


"내가 교황을 대신하려 해. 프랑스의 스파이, 이탈리아의 마피아, 임무는 하나야. 내 인형들아 움직여. 내가 가진 패를 봐, 나를 이길 수 있겠어? 유독 화창한 로마의 신전 앞 소크라테스. 기둥에 새겨지는 신탁을 목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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