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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케 Jul 31. 2024

릴리의 정원

챕터 2. 릴리의 투명한 책장의 기록

펼쳐지는 페이지 중 한 페이지를 내 앞으로 가져와 크게 펼쳐본다. 마치 큰 영화관의 스크린에서 진행되는 장면을 보듯이.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남자가 앉아있는 의자의 앞에는 여러 종이가 붙어있는 벽이 있다. 남자는 무슨 문제를 풀고 있는 것 같았다. 꽤나 어려운 문제를 생각하느라 피곤한 듯 뒷머리를 쓸어 올리며 의자에 몸을 기댄다.


또 한 장면이 펼쳐진다. 장작더미에서 타오르는 불 위에 벽에 붙어 있던 종이들을 날리며 어려운 문제를 다 푼 듯 해방감에 동료들과 기쁜 듯 환하게 웃고 있다.


또 어느 한 장면에서는 맑은 하늘아래 거대한 신전의 기둥에 써져 있는 문자를 손가락으로 쓸어보고 있다. 이전에 봤던 남자와는 다른 시대의 남자 같았다. 옛날 옷을 입은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는 근엄한 얼굴로 무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기둥에 써져 있는 글자가 보인다. ‘Know thyself’ 누군가 뒤에서 그 나이 많은 남자를 부르는 듯 남자는 뒤를 돌아본다.


나와 눈이 마주친 것일까?


하지만 그건 아닌 듯하다.


나는 다락방에서 그 남자가 나오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 남자가 나를 볼 수는 없었다. 분명히 그런데.. 이 느낌은 뭘까.. 분명 눈이 마주친 것 같았는데.. 또다시 장면이 넘어간다.


이번에는 비행기에 타고 있는 남자다. 남자는 어떠한 목적 때문에 옆 자리의 여자를 협박하고 있다. 이번에는 빠르게 페이지가 넘어간다. 방금 보았던 남자의 얼굴이다. 입에는 시가를 물고 조금 더 나이가 많이 들고 야윈 얼굴에 양복을 입고 있다. 그 남자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다.


또다시 장면이 넘어가 이번에는 아주 화려하고 커다란 목욕탕에 그 남자가 걸어가고 있다. 남자의 다리가 화면에 비춘다. 탕에 들어가 얼굴과 상체만 보이는 남자는 양팔을 목욕탕의 벽에 기대고 표정 없는 얼굴로 잠시 시간을 보낸다. 장면은 목욕탕의 전체를 비추며 지나간다. 화려한 금색으로 가득한, 작은 폭포 같은 물들이 양쪽 벽면에서 떨어지지만 바닥에 닿지는 않고 사라지고 있다.


남자는 검은색 고급 소재로 된 가운을 걸친 남자가 복도를 지나 커다란 서재로 들어선다. 서재 가운데에 있는 책상 앞에 앉아 오래된 타자기에 쓰다만 원고를 작성한다. 그 남자가 있는 서재에 누군가 드레스의 끝자락을 흩날리며 살며시 들어온다. 긴 머리를 늘어트리곤 남자와 같은 검은색 가운이 길게 늘어져 마치 드레스처럼 보이는 옷을 입고는 서재의 어떤 한 권의 책을 꺼내 들고는 마음에 드는 듯 남자가 앉아있던 책상에 가져다 놓는다. 하지만 그새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는다. 오래된 타자기도 보이질 않는다. 여지는 타자기가 있던 자리에 책을 두고는 남자처럼 이내 사라진다.


책상 뒤 창문의 커튼이 흔들릴 뿐이었다.


창문에 밝게 비추는 달이 수상하다.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누군가 달을 손으로 집자 다이아몬드로 변해 달을 집은 누군가의 목에 목걸이처럼 걸려있다. 얼굴은 보이질 않지만 방금 그 여자다.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그 여자 밖에 없다고 직감했기 때문이다.


페이지는 계속 넘어가다가 어느 아름다운 건축물의 정원에 있는 사과나무를 보고 있는 한 남자가 보인다. 나는 문득 저 장면으로 넘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방금 전 보았던 여자처럼 사과나무의 사과를 손으로 집어보려 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사과는 떨어졌고 사과나무를 바라보던 남자의 눈에 떨어지는 사과가 비춘다. 시간은 조금 지난 듯 같은 정원에 이번에는 휠체어를 탄 소년이 보인다. 하지만 조금 다른 점은 어느 영화의 촬영장으로 쓰고 있는 듯했다. 안경을 쓴 남자 배우의 눈이 잊히질 않는다. 휠체어를 탄 남자 배우가 나오는 다른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때에는 영국의 마법사 역할을 맡았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그 영화를 어디서 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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