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살까지는 겨울을 좋아했다. 앙상한 나뭇가지와 스산한 거리를 사랑했다. 코트 깃을 세우고 꼬챙이에 찔린 애벌레처럼 몸을 웅크리고 다니는 것이 좋았다. 그때의 나는 꽤나 염세적이었기에 겨울이 뿜어내는 우울한 기운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온기를 갉아먹는 추위와 마음을 무너뜨리는 외로움이 가득한 계절 안에서 타인에게 왠지 모를 가여움을 느끼며 홀로 슬퍼했다. 넷 킹 콜의 진득한 음악을 들으며 이불속에서 모로 누워 에너지를 충전했다. 이런 궁상이 또 있나 싶지만 그땐 그랬다.
그에 반해 여름은 참 성가신 계절이었다. 검게 그을리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던 엄마와 친구들의 영향으로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르고 챙이 큰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양산을 쓰고 다녔다. 서걱서걱 소리가 나는 긴팔의 얇은 여름용 바람막이를 입기도 했다. 뻑뻑한 선크림의 질감과 쩍쩍 들러붙는 느낌이 정말 싫었다. 양 조절에 실패해 조금이라도 과하게 바른 날에는 달걀귀신처럼 허연 얼굴만 동동 뜬 채로 돌아다니곤 했다.
바람이라도 불면 상황은 더 안 좋아졌다. 길고 얇은 머리카락이 맥아리없이 바람에 나부끼다 땀범벅인 얼굴에 쩍 들러붙어버리면 그걸 떼어내기 위한 번거로운 작업에 돌입해야 했다. 최대한 얼굴에 닿지 않게 손끝을 세우고 떼어냄과 동시에 혀로 볼 안쪽을 밀어 머리카락이 떨어지기 쉽게 도와줘야 한다.
시력도 나쁜데 깊게 눌러쓴 모자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자주 넘어지는 것도 싫었다. 더 난감한 건 나는 앞이 잘 안 보이면 소리까지 제대로 안 들린다는 것이다. 보는 것에 너무나도 집중해 듣는 것을 잊어버리는 게 아닐까 짐작된다. 가뜩이나 허둥지둥하는 몸뚱이에 뭔가를 걸치고 들고 안 보이고 안 들리는 총체적 난국이 일어나는 계절이 바로 여름이었다.
TV를 틀면 나오는 여름 특집 프로그램이나 (특히 수영장에서 연예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와하는 버라이어티쇼) 강제로 흥겨움을 유발하며 거리마다 빵빵하게 울려 퍼지는 가요들도 싫었다. 오로지 여름 바캉스만을 겨냥해서 발매된 인기 가요와 춤을 익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과 왁자지껄 어울려야 할 것 같은 그 분위기가 정말이지 싫었다.
어쩌다 여름을 좋아하게 된 건 프랑스에 머물면서부터다. 그곳의 겨울은 지독스럽게 길었고 깊이 외로웠으며 끝없이 어두웠다. 거대한 드럼통에 얼굴을 쳐 박고 한줄기 빛을 찾아 헤매는 느낌이었다. 겨울 마니아인 나도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잠깐이라도 해가 뜨는 날은 온 동네 사람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해가 갔다. 그들은 대부분 하얀 먼지가 여기저기 붙은 까만 코트를 걸쳐 입고 선글라스를 낀 채로 카페에서 볕을 즐기며 커피를 마셨다. 그렇게 나도 그들 틈에서 카페 알롱제 한 잔과 쇼콜라 한 조각을 까먹으며 그렇게 싫어하던 햇볕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 후 남프랑스와 모나코로 떠난 여름휴가에서 여름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를 절실히 느꼈고, 그렇게 나는 여름을 아주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무렇게나 얼룩덜룩 그을린 얼굴에 술 마신 사람처럼 벌게진 목덜미, 지저분하게 타버린 발을 드러내고 돌아다녔다. 여기선 그 누구도 양산을 쓰지 않았고 태양을 피하지 않았다. 더 이상 챙이 큰 모자 속에 머리통을 구겨 넣고 앞이 잘 안 보여 바보처럼 굴지 않아도 되었고, 한 손에는 양산을 들고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바쁘게 왔다 갔다 하지 않아도 되었다. 두 손과 두 발이, 눈과 귀가 자유로웠다.
바로 그 여름에 베리 화이트와 미셸 조나스를 알게 되었다. 그들의 음악은 내가 여태껏 들어본 음악 중 가장 낭만적이었다. 로맨틱한 리듬의 실루엣 사이로 슬쩍슬쩍 아련함도 보이고, 멜로디에 기승전결 스토리가 있었다. 넷 킹 콜의 끈적한 음색도 좋지만 베리 화이트와 미셸 조나스의 경쾌한 목소리도 좋았다. 베리 화이트의 ‘let the music play’와 미셸 조나스의 ‘la boite de jazz’를 특히나 좋아한다.
그 시절 외로움을 잊기 위해 항상 라디오를 틀어놓았는데 ‘노스텔지’라는 프로그램에서 이 음악들을 알게 되었다. 어느 계절에 이 음반들이 발매가 되었는지 잘 모르지만 내가 알게 된 계절이 여름이었기 때문에 돌아오는 여름을 항상 이 음악으로 맞이한다. 풀냄새가 여름 냄새로 바뀌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베리 화이트와 미셸 조나스의 음악을 튼다. 그리고 자두와 복숭아를 큰 유리볼에 담고 선풍기 앞에 드러누워 여름의 망상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