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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Oct 20. 2022

과일을 씻으며 하는 상상

Cartola - o mundo e um moinho


간식은 주로 과일을 먹는다. 시각적으로 아름답고 맛도 좋기 때문이다. 영양소의 조합 같은  고려하지 않는다. 오로지 색감 위주로 두어 가지를 골라낸다. 이글거리는 남쪽 태양의 열기를 잔뜩 머금은 빨간색, 풍성한 볼륨감으로 존재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주황색, 싱그러움을 온몸으로 뿜어내는 연두색  색색깔의 과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또렷한 자신감과 다채로움에 주눅이 들기도 한다. 과일에 주눅이 드는 여자라니. 생각해보니 어처구니가 없는데 한편으로는  재미가 있어 흐응~하고 콧소리 섞인 웃음을 트렸.


차가운 물을 흘려보내며 과일을 빠닥빠닥 씻다 보면 손끝이 얼얼해지고 반복된 행동에 정신이 아득해져 온다. 그리고 어김없이 생각의 고리가 저 먼 곳으로 이어진다.




그날은 산딸기와 오렌지를 씻고 있었는데, 상큼한 향과 세련된 빛깔, 감각적인 생김새 때문인지 십여 년 전 휴가를 즐겼던 모나코가 떠올랐다. 프랑스 유학 시절 모나코를 두 번 가보았다. 모나코를 처음 갔을 때 이곳이 고향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게 아름다웠고 우아했다. 기차에서 내려 마주한 이국적인 풍경과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해변이 아름다웠고, 좋은 소재의 옷을 입고 단정한 헤어스타일을 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몸짓과 여유로운 발걸음이 참으로 산뜻하게 보였다.


호텔 조식으로 먹었던 오렌지 주스의 상큼함과 신선함이 잊혀지지 않는다. 비타민이 통통 튀어 오르는 오렌지 주스를 투명한 유리컵에 한가득 따라 마셨다. 반짝이는 유리볼에는 요구르트와 산딸기가 조화롭게 올려져 있었고, 자그맣고 앙증맞은 스푼으로 그것을 떠먹으며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고운 자갈 모래가 깔린 해변에서는 유유히 떠다니는 요트를 구경하며 수없이 많은 메모를 적었다. 그 메모를 영감으로 글을 써 위대하진 않지만 적어도 꾸준히 팔리는 소설을 써야지 하고 꿈에 부풀었던 기억이 난다.


메모 속에는 늘 그렇듯 이상한 사람이 등장한다. ‘모나코 인간’. 그 어딘가에서 그럭저럭 살고 있던 그는 살성이 굉장히 부드럽다는 특징 빼고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휴가로 온 모나코 해변에서 태닝을 하기 위해 누워 있는 동안 모래자갈들이 몸 구석구석에 콕콕 박히게 된다. 모래 한 알 한 알에는 그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기억이 담겨 있는데, 그 기억들이 자동으로 그의 몸에 프로그래밍되고 만다. 모나코 인간은 시시각각 밀려오는 수많은 이들의 히스토리를 견딜 수 없어,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게 된다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스토리다. 십여 년 후, 출산과 동시에 나는 그때의 메모가 담긴 수첩과 종이를 모두 미련 없이 버려 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손끝이 시리다. 차가운 물에 너무 오래 과일을 씻고 있었다. 아이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서둘러 과일 씻기를 끝내고 듬성듬성 잘랐다. 한쪽 귀퉁이에 이가 나갔지만 제법 근사한 이태리산 하얀 도기 접시에 담아내어준다. 자연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탄생한 달콤한 결과물을 먹으면 좀 더 활기차지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기대를 품고서. 그리고 혹시 어딘가 진짜 ‘모나코 인간’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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